뜰 일을 하다가 잔디 깎는 기계를 천천히 밀며 우리집 앞을 지나가는 노인과 인사했다. 두 블럭의 거리에 사는 노인은 이웃에 사는 거동이 불편한 친구네에 가서 잔디를 깎아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90도 기온의 더운 날이다. 노인의 구부정한 등에 얹힌 지나간 세월이 아름다워서 서서히 멀어져 가는 노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의 옆에서 손주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웃 노인들의 아름다운 우정에 가슴 뭉클하다가 쓰라린 가슴을 쓸어내렸다. 작년에 한국에 사는 옛 친구와 헤어졌다. 고교시절의 단짝 친구로 오랜 세월 서로 의지하며 기쁜 일 슬픈 일 나누며 살아서 그녀의 마음을 내 마음처럼 여겼다. 그런데 우리의 우정은 싱겁게 참으로 어이없게 인연의 줄을 놓았다. 서로가 사는 환경이 다르니 각자의 삶의 가치관도 달라졌다. 보태서 한국과 미국의 문화 차이에 대한 서로의 배려와 이해가 부족했다. 우리는 ‘우리’가 아닌 ‘너와 나’가 되어 있었다.
언젠가부터 슬그머니 대화가 줄어들다가 어느날 아주 시시한 일에 삐친 친구와 나는 대화하는 법을 몰랐다. 티격태격 하지 않고 누구도 먼저 손을 내밀지 않고 각자 침묵을 지키던 시간이 6개월쯤 지나니 감정적으로 내가 지쳤다. 가만히 생각하니 반세기가 지날 동안 우리는 한번도 다투어 본 적이 없어서 다툰다는 것 자체를 몰랐고 우리 사이에는 태평양이 버티고 있었다. 다신 우리의 우정이 옛 상태로 회복되기 힘들다 생각되어 내가 대화의 문을 닫은 것이 작년 이맘때의 일이다.
그리고 나이가 또한 걸림돌 이었다. 젊은 시절이라면 패기가 있어서 너 잘났네 나 잘났네 하고 조목조목 따지기라도 했을터지만 지금은 가볍고 싶은 시절이 아닌가. 얼굴을 마주보는 것도 아니고 문자로 변덕을 피울 여유가 없고 힘겨워서 그녀와의 우정을 내려놓았는데 오랫동안 그 친구는 내 의식을 잡았고 그동안 만든 많은 아름다운 추억들이 밤잠을 설치게 했다. 솔직히 아직도 자주 그 친구를 생각한다. 어디서 무엇을 하든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를 빌면서 오랜 세월 좋은 친구가 되어 준 것에 감사한다.
5살 손주와 생활한 지 4주째다. 아이가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저녁에 잠이 들 때까지 내 우주는 아이를 중심으로 돈다. 현 사회에 민주주의가 휘청거리듯이 내 일상의 스케줄과 활동은 자유와 평등을 존중하는 민주사회가 아니다. 완전 일방적인 작은 독재자인 아이에 따라 노래하고 춤춘다. 다트나 활쏘기와 콩주머니 던지기는 아이의 흥미를 오래 끌지 못하고 농구 축구 야구 닷지볼에 베드민턴까지 자신만의 룰을 만들어내는 아이와 뛰다가 지쳐서 먼저 포기하는 것은 나다. 내가 힘이 드니 그만하자고 하면 아이는 감정적인 협박을 한다. “할머니는 내가 행복한 것을 싫어하세요?” 맹랑한 아이다.
수영을 배우다가 심해잠수에 흥미를 가져서 주인장에게 꼬치꼬치 잠수에 필요한 장비와 각 부품의 역할을 배운 아이는 “무거운 장비를 메고 물속에 들어가면 위험하니 할머니는 심해잠수 하지 마세요” 며 나를 사랑한다. 며칠째 우주 정거장에 대단한 호기심을 보인다. 누가 무슨 자료로 어떻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그곳에 상주 근무하는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먹고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우주에서 사는지 궁금한 것들이 많다. 그렇게 바다와 우주는 무한한 신비다.
레슬링 연습하는 아이의 상대가 되었다가 온몸에 타박상을 입었고 건건이 자기 주장이 강한 아이와 지치지 않고 말상대를 한다. 목소리를 높이는 아이와 함께 나도 목소리를 높이고 고집을 피우는 아이와 함께 나도 고집을 피운다. 무조건 사랑하기로 했으니 어른 자존심은 없다. 그리고 아이의 훈육은 부모의 몫이니 나는 아이와 즐겁게 지내려고 한여름의 열기속에서 희극보다 더 우스운 장면을 연출하며 놀다 보니 하루가 빠르게 휙휙 지나가고 지루한 순간이 없다. 몸은 피곤하지만 아이가 주는 싱싱한 에너지가 좋다.
요즘 옛 친구는 고사하고 가까이 사는 친구도 잊고 지나다가 거동이 불편한 친구의 잔디를 깎아주는 이웃 노인의 우정에 감탄해서 오늘은 원근에 사는 친구들이 보고 싶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