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가 참 멀었다. 집에서 학교까지 가려면 산등성이를 몇 개나 넘어야 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일학년 때까지는 산그늘에 쉬어가며 에움길로 다녔는데, 아홉 살 때부터는 언니들을 따라 신작로로 학교에 다녔다.
신작로라고 하지만, 그때는 포장되지 않은 자갈길이었다. 자갈길을 따라 걷는 것은 물려받은 운동화처럼 헐렁대고 불편했다. 거기다 군데군데 구덩이가 파여서 비가 오는 날에는 차가 지날 때마다 우산으로 막지 않으면 흙탕물을 옴팡 뒤집어써야 했다.
맑은 날도 좋을 수만은 없는 길이었다. 경운기라도 한 대 지나가면 흙먼지가 뽀얗게 일어 목구멍이 깔깔했다. 더구나 쌩쌩 달리는 차들은 먼지뿐 아니라, 돌멩이까지 날렸다. 먼지와 돌멩이가 무서워 차들이 내뿜는 매연 같은 것은 관심도 없었다. 사실은, 저렇게 비싸고 좋은 차에서 나쁜 연기가 나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시절이었다.
그 신작로는 읍내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이었다. 도랑을 건너고, 진흙 길을 걷지 않아도 되는 길, 조금 위험을 감수하면 빠르게 학교에, 시장에 갈 수 있는 길이었다. 모든 지름길에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나이 들면서 깨달은 지름길의 속성은 편리함과 화려함이다. 성실하게 일해서 얻어야 할 것을 화려한 겉모습으로 얻으려는 얄팍한 편리성이다. 어릴 때는 그런 길이 더 좋아보였다.
신작로는 무서웠지만, 아이들에게는 장난감 공장이기도 했다. 아이들의 공깃돌은 모두 신작로에서 나왔다. 지나가는 차들을 피해가며 동생이랑 공깃돌을 주머니에 가득 주워 와 그늘에 앉아 놀았다. 동생이 주워온 돌은 크기가 제각각이라 공깃돌은 못 되었지만, 하얀 차돌이나 예쁜 사금파리가 섞여 있어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곤 했다.
동글납작하게 생긴 초록 유리 조각 하나는 아직도 내 책상 서랍 속에 있다. 닳고 닳아 날카로움이 사라진 유리 조각을 볼 때면 이상하게 마음이 애달프다. 달리는 차바퀴 아래 자갈돌 사이에서 날카로움을 깎아내고 있었을 유리 조각, 그렇게 희미한 초록빛을 간직한 채 부드러운 곡선을 만들어 낸 유리조각처럼 우리는 어른이 되는 걸까……
열두 살에 떠나온 고향인데, 아직도 먼지 풀풀 날리던 그 신작로가 그립다. 그리움에 담긴 신작로의 주인공은 버즘나무다. 찻길 양옆으로 드문드문 서있던 버즘나무는 여름에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 주고, 가을이면 잎을 툭툭 떨어뜨리며 친구가 되어 주었다.
줄기의 모양이 영양부실로 핀 마른버짐처럼 얼룩덜룩해서 이름만 버즘나무일텐데, 그 신작로의 버즘나무는 그 이름처럼 영양상태가 늘 안 좋았다. 뭉텅한 몸통 위에 제대로 자라지 못한 가느린 가지들을 이고 있는 모습, 멋있게 쭉쭉 벋지 못하고 꼬부랑 할머니처럼 웅크리고 있던 버즘나무는 나의 할머니를 닮았다.
한평생 돌밭에 쪼그려 앉아 호미질 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먼 길을 걸어 집으로 오다 밭에서 할머니를 만나면, 할머니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져 먹거리를 내주시곤 했다. 호박엿, 박하사탕 같은 달달한 먹거리는 사막을 건너는 여행가가 마시는 물 한 모금처럼 달았다.
집은 멀었고, 나는 늘 혼자 걸었다. 그 길을 걷다가 만나는 사람은 그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마을 어른을 만나면 모두가 우리 가족처럼 보였다. 잠시 인사를 드리고 가던 길을 가면서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보았다. 뒤돌아보면 만났던 사람들은 항상 저 멀리 가고 있었다. 어른들은 축지법으로 걷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며, 아쉬워하며,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하면서 걸었다. 까만 한 점으로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것은 사람에 대한 선천적 그리움이었다. 지금도 외롭다고 느낄 때마다 그 길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아마도 내가 그 길에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처음으로 배웠기 때문일 것이다. 길 위에 홀로 걷는 사람은 다 외로운 존재이다.
어른이 돼서 다시 찾아간 그 길은, 차로 달려 십오 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마을 입구에는 커다란 공설운동장이 세워졌고, 신작로는 아스팔트로 잘 포장되어 있었다. 도로를 넓히면서 버즘나무는 아쉽게도 모두 잘려나가고 없었다. 하지만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그 길은 뽀얀 먼지를 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