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6)
몽고메리에는 배롱나무가 많다. 배롱나무는 백일 동안 꽃을 피운다 해서 백일홍나무라고도 하며, 보라, 분홍, 자주 등 다양한 색깔의 꽃이 핀다. 한여름을 대표하는 꽃이라 할 수 있는 백일홍처럼 무더위 속에서 자태를 빛내는 또 하나의 꽃이 참나리다. 백합과에 속하는 참나리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서 한국의 산과 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여름 숲에서 참나리를 만나면, 나는 언제나 개나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식물이름 앞에 붙는 ‘참’이라는 접두사는 쓸모가 많고, 유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고, ‘개’라는 것은 조금 모자라거나 먹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참나리는 약용과 식용으로 쓰이지만, 개나리는 그러지 못해 붙은 이름일 거다.
옛말에 ‘땅도 이름 없는 풀은 기르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세상 모든 것에는 이름이 있다는 뜻이다. 사람의 이름은 어떤 의미일까?
〈My Name Is Yoon〉, 이 그림책에 나오는 ‘윤’은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와서, 자신의 이름을 ‘윤’이 아니라, ‘YOON’으로 써야하는 것에 혼란을 겪는 아이다. 책에서 윤은 과장스러울 만큼 둥글납작한 얼굴에 잔뜩 치켜 올라간 눈을 가진 아이다.
미국에 왔으니, 영어로 이름 쓰는 법을 가르쳐 주는 아빠 옆에서 윤은 도무지 자신의 이름 같지 않는 ‘YOON’을 바라본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 가득한 윤은 학교에서 자신의 이름 대신 칠판에 쓰인 ‘CAT’을 쓴다. 구석에 숨은 자신을 엄마가 부드럽게 안아주기를 바라면서. 윤이 그린 새 그림에 아빠가 ‘BIRD’라고 쓴 다음 날은 자신의 이름을 적는 종이에 ‘BIRD’라고 쓴다. 새처럼 날아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면서. 혼자 앉아 놀고 있는 윤에게 같은 반 친구가 다가와 컵케익을 준 날은 윤은 자신의 이름대신 친구가 가르쳐준 ‘CUPCAKE’을 쓴다. 친구들이 자신을 컵케익처럼 좋아해주기를 바라면서.
이름 대신 고양이, 새, 컵케익을 쓰는 윤을 늘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봐주는 선생님을 보면서 윤은 생각한다. 어쩌면 선생님은 나를 좋아할 지도 모른다고, 다르다는 것이 좋은 것일 수도 있다고. 다음 날 윤은 자신의 이름을 ‘YOON’이라고 쓴다.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윤을 안아주며 “너는 윤이구나!”라고 한다. 마지막 장에 ‘YOON’ 이라고 자신의 이름을 쓴 종이를 활짝 웃으며 들고 있는 윤은 말한다. ‘나는 지금 영어로 내 이름을 쓴다. 내 이름은 여전히 ’빛나는 지혜‘를 의미한다.’
책 제목을 보고 당연히 한국 작가의 책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의 작가는 헬렌 레코빗(Helen Recorvits)으로 폴란드,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온 이민자의 후손이라고 한다. 작가는 로드아일랜드에서 태어나 그 곳에서 자라고, 공부했으며, 결혼 후에도 로드아일랜드에서 살고 있다고 소개되어 있다. 이 책뿐만 아니라, 〈윤과 크리스마스 벙어리장갑〉, 〈윤과 옥팔찌〉 같은 책을 이어서 쓴 걸 보면 한국과 어떤 연결고리가 있을 거라는 짐작만 할뿐이다.
사람의 이름은 세상에 태어나서 최초로 받는 선물과 같다. 소중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아무렇게나 줍거나, 골라서 주는 사람은 없다. 이렇게 소중하게 받은 이름을 갑자기 바꿔야 하는 상황에서 윤과 같은 어린 이민자는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생각하게 되는 책이다.
대부분 외국인은 받침이 있는 한국이름을 발음하기 어려워한다. 그래서 영어이름을 따로 만들어 쓰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영어이름 때문에 정체성을 의심받는다는 것은 옛말이다. 한국에서도 영어이름을 본명으로 하는 경우가 많아졌고, 이상하게 발음되는 한국이름보다 쉽게 부를 수 있는 영어이름에 대한 선호도가 높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담긴 이름을 받는 것보다 지금 내 이름을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한글로 쓰든 영어로 쓰든 자신의 이름에 ‘빛나는 지혜’를 담고 싶은 윤처럼 나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올바른 정체성을 찾아가야 할 것이다. 다만 하나의 몸짓인 존재가 비로소 꽃이 된다면, 그 이름이 참나리이든 개나리이든 무엇이 중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