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2주간 한국에 가서 편찮으신 친정 아버님과 가족들을 만나보고 와서 누렇게 빛 바랜 옛날사진 한 장을 내놓았다. 친정 부모님이 가지고 있다가 임자에게 되돌려준 사진이라고 한다. 사진을 들여다보니, 젊은 우리 부부가 가운데 서고, 나의 친척 몇 분들은 내 쪽에, 장인 장모를 비롯한 아내의 친척들은 아내 쪽에 선 사진이다.
“야 이 사진 옛날 사진이네, 언제 찍은 거지?” “1971년 3월 1일, 자기가 유학올 때 김포 공항에서 찍은 거야.” “아, 그렇구나. 우리 부부 양가에서 귀한 분들이 다 오셨네!” “그때만 해도 미국유학 오는 것이 집안에 큰 경사라고 그렇게 모여서 환송했지. 51 년 전에.” “그러고 보니 집안에서 많이 미국에 왔지만 내가 선구자네.”
사진 속에 보이는 장인은 당시 40대 중반, 학교 교사였고 젊고 건강해 보인다. 그렇게 건강하던 장인도 이젠 90대 중반 노인이 되고, 넘어져서 골절환자가 되어 요양사와 가족의 돌봄을 받으며 연명하신다.
“맘, 내가 맘과 같이 외할아버지 보러 한국에 갈 비행기표 샀어.” 그렇게 통고한 것은 뉴저지에 사는 큰 아들이었다. 외할아버지가 그 연세에 넘어져 골절을 당하셨다는 소식에, 그의 병원에서도 늙어서 넘어져 골절이 오면 사망에 이르는 환자를 많이 본 의사인 그는 코로나 펜데믹 때문에 한국에 갈 수도 없어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못 뵐지도 모른다고 안타까워했었다.
전염병도 수그러지고 사람들이 많이 한국에 가니 아들은 엄마를 모시고 한국에 가서 외할아버지를 보고 왔다. 나도 한국에 가지 않은 이유는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불편과 시차 때문에 더 이상 못 가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늙고 병드신 분들이 한국에 다녀오고 나서 약해진 면역력 때문에 지병에 합병증이 생겨 고생하시다 돌아가시는 분들도 여러분 보았다.
한국에 간 아들은 가까운 호텔에 묵으며 외할아버지를 거의 매일 찾아가 뵈었다고 한다. 황반변성이라는 눈병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아 스스로 식사도 못해 누군가 음식을 먹여 주어야 하고, 휠체어에 앉아서도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외할아버지를 찾아가서, 외할아버지 손을 꼭 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담당 의사가 되어 외할아버지를 극진히 도와주는 모습이 감동적이였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열심히 공부한 영어를 쓰고, 외손자는 조금 배운 한국말과 영어로 대화하는 장면이 아름다웠다고 한다.
아내가 가져온 빛 바랜 사진이 찍힌 1971년, 3살 반이었던 아들은 엄마와 함께 외가에 일년 반 있다가, 유학생 가족으로 미국에 왔다. 그 때 외가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보호와 사랑 속에 산 아들은 외할아버지와 각별한 사이가 되었다.
아내가 한국에 머물며 카톡으로 보내 준 사진 중에 손자와 외할아버지 사진을 보고 놀랐다. 휠체어에 앉은 할아버지 옆에 앉아 오른팔로 할아버지 어깨를 안은 외손자 사진, 대머리의 두 사람은 닮아보이고, 놀라운 것은 95세난 환자, 밥도 스스로 못 먹고, 걷지도 못하고 시력도 어두운 노인의 얼굴이 주름도 없고 밝은 것이다. 할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는 살아오면서 만난 좋은 사람들, 기대하지 않았던 잘된 일들, 모두 긍정적인 이야기만 들려주고, 살아오면서 만난 큰 사건들을 모두 긍정적으로 해석한다고 아내도 아들도 말한다. 늙은 몸이 병고로 임종에 가까우면서도 감사하며 사는 표본 같은 분이다.
반면 장모님 사진을 보니 많이 늙으셨고 고생의 흔적이 표정에 묻어 났다. 아버지가 엄마를 부를 때는 ‘엄마’하고 부른다고 아내가 보고한다. 첫 아이의 엄마로 부르던 이름이 이젠 마치 4살짜리로 되돌아간 아이가 보호자 엄마를 부르는 것 같고, 병들어 고통을 받으면서도 어린애의 편안한 얼굴 표정이라고 한다. 두분 다 정신은 말짱해서 치매기는 없어 다행이라고 한다.
아내가 놀란 것은 엄마와 같이 자던 방에서 아침 6시면 90대 중반의 여자노인인 엄마가 거실에 나가서 녹음기 소리에 맞추어 보건 체조를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도 넘어지기 전에는 엄마와 같이 보건체조를 매일 했다고 한다. 엄마는 신문과 책을 읽고, 아버지도 간병인에게 책을 읽어 달라고 하고, 라디오를 두개 가지고 설교와 강연을 계속 들어서 그런지, 두분 다 아직도 정신이 말짱하다고 아내는 말한다.
아들이 주동이 되어 아내의 5남매들이 다 모였던 가족파티는 즐거웠고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나는 엄마의 지갑이야” 라며 아내가 사고 싶은 물건을 살 때 돈을 내 준 아들을 아내는 자랑한다. 나의 동생이 큰조카가 병드신 외할아버지를 뵈려고 휴가를 내서 온 일과, 작은 조카가 미국에 혼자 남은 늙은 형을 위해 일주일 같이 있었던 효심을 칭찬하더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