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HD 생방송의 2022-23 시즌 첫 작품은 이탈리안 작곡가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 였다. 이 오페라는 언제 봐도 가슴 울렁이게 하는 작품으로 어떤 오페라 가수가 무대에 서든지 아름다운 음악과 드라마는 감동을 준다.
이번 작품도 마찬가지였다. 가늘게 흐느적 꿈틀거리던 서곡이 연주되고 막이 오르니 놀랍게도 마지막 장면, 주인공 비올레타가 숨을 거두는 순간이 잠시 무대에 펼쳐졌다. 그녀가 연인 알프레도와 주위에 둘러 서 정지된 지인들과 작별을 하고 무대를 떠날 때까지 나는 그녀의 침대위에 머물었던 거대한 동백꽃 한송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이어서 동백꽃은 사라지고 무대는 활기찬 연회장으로 바뀌면서 본격적인 드라마가 시작됐다. 더불어 극 중간에 남녀 무용수들이 파티장에 나와서 신나게 춘 역동적인 춤은 좋은 눈요기였고 자유분방한 파티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아름답고 환상적으로 설치된 무대위에 한 젊은 여인의 기쁨과 슬픔이 애절한 멜로드라마로 공연됐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배경으로 지나가는 것을 따르며 주인공 비올레타역의 성량 풍부한 미국 소프라노 나딘 시에라가 부른 수 많은 아리아에 쏟아지던 감정의 홍수에 젖었다.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서 코르티잔인 비올레타에게 떠나줄 것을 부탁하는 알프레도 아버지의 음성에 강한 호소력이 있었다. 사랑을 찾고 또 잃은 병든 여인이 죽음을 맞는 슬픈 스토리를 그녀의 아리아는 높고 낮은 엄청난 범위의 목소리로 전해서 가슴이 아파서 눈물이 나왔다. 악인은 없고 사회 환경과 기존 관념에 희생된 사랑이었다.
사실 영화관에서 보는 오페라는 장점이 많다. 열연하는 가수들이 화면에 클로즈업되어 그들의 표정연기까지 자세히 보게되니 저절로 스토리에 끌려든다. 그리고 무대 뒤에서 오페라 가수가 작품을 소개하고 주인공들과 오케스트라 지휘자와 하는 인터뷰는 관객들을 극 속에 더욱 몰입시킨다. 무대장치와 의상을 창작한 전문가들로부터 그들의 해석을 듣는 것 또한 작품에 색다른 묘미를 보태고 한 작품이 무대에 오르는데 기여한 많은 예술가들의 독특한 창조력에 감탄한다.
오페라를 보러 몽고메리의 극장에 오는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숫자다. 넓은 극장에 드문드문 앉아서 조용히 오페라를 즐기는 사람들은 대부분 하얀 머리의 오페라를 사랑하는 노인들이다. 오래 사귄 토박이 친구도 있고 다른 장소에서 만나 안면이 있는 사람도 있다. 10년 이상 극장에서 함께 오페라를 보니 늘 오던 누군가가 보이지 않으면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아무래도 노인들이니 이름을 모르는 그 사람의 부재를 걱정하기도 한다.
공연때마다 얼굴을 보며 대충 눈인사를 하는데 폴라도 그 중의 한 사람이다. 오늘은 그녀가 전동휠체어에 탄 어머니를 앞장 세우고 극장에 들어왔다. 나는 윗자리에 앉았고 그들 모녀는 입구 가까이 자리를 잡았다. 하얀 머리의 작은 체구의 그녀 어머니는 막이 내리자 모두 일어나 극장을 떠나도 시선을 화면에서 떼지 않았다. 관객 몇 사람과 이번 공연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가 나는 폴라의 어머니한테로 갔다.
이번주에 92 생일을 맞았는데 생일 선물의 하나로 폴라가 오페라 구경을 시켜줘서 왔다는 폴라의 어머니 팻은 원래 음악을 좋아하고 막상 오페라를 본 것은 생전 처음이라며 약간 흥분해 있었다. 그 말에 내 눈이 떠졌다. 얼마나 감동적인가. 극장에서 보고 감동을 받아서 자리를 떠나기 아쉬워하는 그녀가 오페라극장에서 직접 공연을 보게 된다면 어떨까? 궁금했다. 그리고 92년을 살면서 많은 체험을 하고 우여곡절을 다 겪었을 그녀의 가슴에 출렁이는 감정을 느끼니 사랑에는 나이가 없음을 확신 받았다.
폴라에게 다음 공연때 어머니를 꼭 모시고 오라고 당부하고 극장을 떠나면서 나는 파리의 한 파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술잔을 높이 들고 경쾌하고 활기차게 부르던 ‘축배의 노래’ 떠올리니 마지막 장면의 암울한 기운이 떨쳐 나갔다. 그러나 하얀 동백꽃을 알프레도에게 주며 그의 사랑을 받아준 비올레타와 쉽게 헤어지지 못했다. 드라마 같은 삶과 삶 같은 오페라에, 사랑의 열정에 한동안 도취되었다. 앞으로 음악이 보여주는 드라마에 감동한 92세 노인의 눈과 마음으로 나도 신선하게 오페라를 보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