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년 전인 1975년 4월30일, 자유월남은 공산월맹의 기습적인 무력공격에 의해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최근 월남 패망을 기억에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한반도 안보 현실이 위태로워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불안감의 발로일 것이다.
1973년 1월 27일 파리평화 협정 당시 월남(남베트남)은 월맹(북베트남)보다 경제력은 물론 군사력에서도 월등히 앞서 있었다. 그래서 월남 지도부와 국민들은 상황을 너무도 쉽게 낙관했다. 그 누구도 공산군이 남침하리라고는 믿지 않았다. 오랜 전쟁에 지친 국민들은 평화 무드에 들떠 있었다. 국방과 안보를 강조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되었다.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월남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월맹의 남침계획은 멈추지 않았다. 1974년 10월 월맹의 하노이에서 열린 비밀회의에서 월남에 대한 총공격계획이 결정됐다. 월맹 지도부는 남침 공세를 편다 해도 미국이 월남 방위공약을 이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3월 10일, 월맹은 드디어 파리평화협정을 파기하고 월남에 대한 총공세에 나섰다. 반띠엔둥이 이끄는 월맹군이 중부 월남 고원지대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월남군은 지리멸렬, 전투다운 전투 한번 못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50%의 병력이 붕괴됐다. 1975년 4월 30일, 소련제 탱크를 앞세운 월맹(북베트남)군과 베트콩은 사이공 시가지에 무혈입성, 대통령 관저인 독립궁에 임시혁명정부 깃발을 꽂았다. 이날 새벽 7시, 대사관을 경비하던 미 해병대 병력이 마지막 헬기를 통해 탈출했다. 이로써 남베트남은 멸망했다.
군과 국가 지도층의 부패와 부정축재, 천민자본주의 행태는 공산 세력들의 훌륭한 공격 목표가 되었다. 지도층의 부패에 분노하던 일선 장병들은 공산군이 쳐내려오자 장비고 뭐고 다 버리고 도주하기에 바쁜 장군들과 장교들을 보면서 썩어빠진 체제에 절망하여 국가를 지켜야 한다는 애국심과 사명감을 상실했다. 1973년 1월 27일 파리 평화협정으로 미군과 한국군이 철수하게 되자, 100만 대군을 자랑하던 월남군은 월맹군의 공세 앞에 제대로 저항 한 번 못해보고 그대로 붕괴됐다. 세계 4위의 공군력과 미군의 고성능 무기로 무장한 125만 월남 군대는 ‘거지 군대’나 다름없는 월맹군에게 기습 공격을 당한 지 불과 51일 만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무너졌다.
한 나라가 망할 때면 비슷한 현상들이 공통적으로 발생한다. 1975년에 공산화된 베트남과 캄보디아, 그리고 한국이 처한 현재 상황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유사점들이 도출된다. 첫째, 군사력의 강약 여부와 관계없이 내부의 적(공산주의자)들로부터 침략을 당하자 군대가 모래성처럼 무너졌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사회지도층과 군 지휘부가 걷잡을 수 없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사회지도층 아들들은 입대 영장이 나오면 장교나 병사로 입대한 후 뇌물을 주고 장기 휴가를 받아 해외 유학을 떠나거나 대학 입학, 취업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 장군들이 운영하는 개인기업체에 파견되어 무보수로 일하는 군인들도 있었다.
둘째, 사회 각계각층, 특히 국가 핵심 지도부에 간첩이 침투하여 이적행위를 일삼았다. 베트남은 패망 전, 사회 각계각층은 물론 국가 최고 지도부, 군 수뇌부에 수많은 월맹 간첩이 침투하여 이적행위를 일삼았다. 대통령 비서실장과 법무부 장관, 모범적인 도지사로 평판이 자자했던 녹따오, 대통령 선거에서 2위 특표를 한 야당 지도자 쭝딘주를 위시한 다수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공산 간첩이었음이 드러난 것은 베트남 패망 후의 일이다. 캄보디아 국경선 근처 빈룽성 내의 지하 땅굴에 있던 혁명정부 청사에는 베트남 정부의 각 부처, 베트남군 총사령부에서 진행된 극비 회의 내용이 하루만 지나면 통째로 입수될 정도로 티우 정권의 핵심부 곳곳에 공산 간첩들이 대대적으로 침투해 있었다.
셋째, 공산당의 내부 침투를 막아내야 할 공안기관이 철저하게 붕괴되었다는 점이다. 베트남에서는 군사 쿠데타가 벌어질 때마다 대공 전문가들이 쫓겨나는 바람에 베트남 대공기관과 정보기관은 껍데기만 남았다. 그들은 월맹 정보 수집은 물론, 베트남 내부에 침투한 공산 프락치 검거에도 무력했다. 한 나라를 가장 쉽게 망하도록 하는 길은 그 나라 정보기관을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 정보기관과 대공기관이 정권의 부침에 따라 평지풍파를 겪으면서 식물조직이 된 것은 베트남 패망 당시의 모습과 충격적일 정도로 비슷하다.
넷째, 종교계, 학교, 시민단체에 공산 프락치들이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을 조직해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의 경우 천주교의 짠후탄 신부, 불교계의 뚝지꽝 승려 등 종교인들은 ‘구국 평화회복 및 반부패 운동세력’이라는 단체를 결성했다. 이 단체는 산하에 사이공대학 총학생회, 시민단체들이 시민연대를 구성하고 반부패 운동을 벌였다. 이 조직에 공산 프락치들이 대거 침투하여 거대한 반정부 세력으로 변질되었다. 베트남 패망 당시 베트남에는 공산당원 9,500명, 인민혁명당원 4만 명 즉, 전체 인구의 0.5% 정도가 사회의 밑뿌리를 뒤흔들고 있었다. 목사․승려․학생․직업적 좌경인사․반전운동가 등 민주화 세력으로 위장한 좌익 단체들은 틈만 나면 ‘티우 정권 타도’를 외쳤다.
문재인 정부에서 수면 아래로 가라 앉아 있던 국가 보안법 위반 사건들이 다시 정국의 전면으로 부상하고 있다. 문 정부가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안보와 경제는 물론 교육 사회 문화예술 등 모든 분야에서 요직을 독점하고 혈세를 마구잡이로 탕진하는 부정부패와 사리사욕까지 앞세우며 적화에 광분하는 동안 곪고 곪아 터진 것이 최근 창원을 근거지로 한 진주와 전주 등지의 반국가적 간첩 활동이다.
방첩망의 붕괴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북한 공작원 접촉 사실을 확인하고도 윗선의 반대로 5년간 수사를 하지 못했다는 내부 폭로가 터져나와 다시 한번 국민을 놀라게 했다. 간첩 수사에 북한이 반발해 남북 관계가 악화될까봐 국정원 수뇌부가 수사 허가를 내주지 않았다고 한다. 간첩을 잡고 대북 정보를 수집해야 할 국정원이 오히려 간첩 수사를 방해하고 북한의 대남 공작을 도왔다는 얘기다. 지금 대한민국에 이들만이 간첩 활동을 하고 있을까? 이미 황장엽 씨 등이 대한민국에서 암약하는 고정간첩이 3만 명에서 5만 명에 이른다고 했었다. 지금은 대한민국에 고정간첩이 얼마나 될까? 지금 대한민국의 길거리에 간첩들이 득실거리고 있다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