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한 분이 곁에 있기라도 하면 그 방안 전체 분위기를 일순간에 변하게 하는 그 청정한 생명력을 아는가. 작은 풀 포기 같은 생명체가 발산하는 무한한 에너지는 마냥 신비스럽기만 하다. 사시장철 변치 않는 고고한 자태와 잎이 그려내는 우아한 곡선미. 깊고 그윽한 향기. 그리고 언뜻 스치는 신비로움에 보이지 않아도 느끼는 언어…그러기에 난을 가리켜 기다림을 아는 식물이라고 했다. 기다릴 줄 알게 하기에 우리의 성정(性情)까지도 변하게 하는 것이 난이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호접란 한 분을 선물 받아 애지중지 키우고 있다.
난은 비록 말 없는 꽃이지만 큰 위로와 기쁨을 주고 무언의 대화를 나눈다. 청초한 잎이 그려내는 부드러운 선, 영묘하기 그지없는 꽃 모양과 색채. 참으로 우미수려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린다. 난에는 군자의 기품이 있다. 그래서 예부터 난을 가리켜 ‘왕자(王者)의 꽃’ ‘군자의 꽃’으로 비유했는지도 모른다. 흔히 난초의 꽃말은 ‘미인’이라고들 한다. 그것은 곧 은근한 여성의 미를 단적으로 들추어내는 말인 듯하다. 쭉 곧은 줄기는 만고의 절개를 은은히 말해 주고 있다. 춘란은 미인과 같아서 꺾지 않아도 스스로 향기를 바친다.
난에 관한 옛노래 가운데 ‘기란조(徛蘭操)’라는 것이 있다. 이 노래는 공자가 지은 것으로 난을 빌어 선비의 지조를 노래한 것이다. 공자는 그 무렵 세태의 어지러움을 걱정하여 중국의 모든 고을을 하나로 묶어 이상향을 세우겠다는 생각을 갖고 여러 나라의 왕후를 찾아다니면서 왕도(王道)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러나 그를 중용하려는 왕후가 없어 낙망하여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되었다.
고개를 넘어 골짜기를 지날 때 공자는 잡초 속에 피어난 한 포기의 난을 발견했다. 난은 잡초 속에 묻혀 있으면서 그 자태가 무척 의연했고, 힘껏 꽃을 피워 그윽한 향기를 아낌없이 뿜어내고 있었다. 고고한 자태와 향기로 보아 이 꽃은 좋은 정원에서 가꾸어져야 마땅했다.
공자는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면서 난을 빌어 실의를 달래는 시 한 수를 지었다. 비록 초야에 묻혀 살아도 사람들에게 아부하지 않을 것이며, 이 난처럼 청초하게 그리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아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옛사람들은 매화와 난을 가장 높이 쳤다. 매화는 찬 기운으로 꽃이 피므로 그 품위가 맑고, 난은 고요함이 꽃으로 변하므로 기품이 깊고 그윽하다고 했다. 일찍이 ‘난은 잎만 보아도 좋으니라.’고 말한 분은 가람 이병기 선생이다.
이 멋진 잎도 건성으로 보면 풀잎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길러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게 된다. 생장부터가 다르다. 풀잎은 며칠 사이에 제 키를 다 자라버리지만, 난은 그렇지 않다. 금년에 나온 잎이 그 다음 해 여름이 되어야 다 자란다. 이태를 두고 조금씩 더디게 자라는 것이 난이다. 이렇게 자란 잎이기에 명을 다할 때도 잡초 같진 않다. 하나의 잎이 시드는 데만도 자그만치 3년이나 걸린다.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유유자적의 정신이다. 다음은 가람의 시조다. 난의 외양과 정신이 잘 묘사된 시라 하겠다.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자줏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정(淨)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우로(雨露)를 받아 사느니라.
난초에 대한 깊은 사랑과 예리한 통찰력으로 난초의 외양과 성품을 사실적으로 노래한 이 작품은 시인이 소망하는 정신적 삶의 방식을 통해 현대인이 지향해야 할 삶의 자세를 일깨워준다. 평소에 아끼고 사랑하는 난초를 두고 그 외모의 수려함과 그 내재적인 본성을 예찬하면서, 고고한 삶을 영위해 보려는 의지를 보이고 있다. 티끌도 멀리하고 이슬만 마시고 사는 난초의 삶이란 곧 선비의 깨끗한 삶의 이상이었다.
옛사람들은 한 송이의 꽃을 보되 미적인 가치보다 윤리적인 가치를 먼저 생각했다. 매란국죽이 사군자에 드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난은 그 자태가 고아하고 잎이 청초하고 향기가 깊고 그윽하며 기품이 우아하다. 말하자면 운치를 아는 선비와 같다. 난은 우리의 마음을 향기롭게 하며, 여유와 운치 그리고 기품있는 인내심을 가르친다. 난은 우아와 운치를 중히 여기던 선비문화의 꽃이었다.
‘지란지교(芝蘭之交)’란 말이 있다. 지초(芝草)와 난초(蘭草)의 교제라는 뜻으로, 벗 사이의 맑고도 고귀한 사귐을 이르는 말.이다. 성경에 나오는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이 바로 지란지교가 아니었을까. 드라마 ‘상도’에서 “장사는 부를 남기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남기는 것이 진정한 장사다.”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 말은 신뢰를 동반한 사귐이 사람에게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나를 대신하고 서로의 분신처럼 여길 수 있는 친구를 가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만리길 떠나면서 처자식을 맡기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제 내 삶의 황혼을 바라보고 있는데 나는 마음이 외로울 때 ‘너 뿐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한 사람을 가지는 게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높고 편한 자리’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여지껏 모르고 살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