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일(反日)과 혐한(嫌韓). 한국과 일본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이다. 1945년 8·15해방에서 78년이 지나고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이후 58년이 흘렀다. 그러나 한국은 자신이 피해자라는 입장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최악의 한일관계가 계속되는 지금, 일본인이 보는 한국의 모습은 어떠할까?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 이 책은 40여년 동안 한국을 취재해 자칭 ‘코리아 워처’라 자부하는 구로다 가쓰히로 산케이신문 서울 주재 객원 논설위원이 쓴 평론집이다. 한일관계 정상화에 도움 주기 위해 썼다는 그는 말한다.“한국이 진정한 선진국이 되려면 ‘일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권고한다. 한국을 잘 안다고 하는 일본인들이 한국을 과연 어떻게 바라보는지, 우리와 생각이 어떻게 다른지를 보여 준다.
그는 “한국인들의 고질병은 ‘있었던 역사’보다 ‘있어야 했던 역사’를 중시하는 사고”라고 지적한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역사가 아니라, 마음에 들지 않는 역사는 “본래 이래야 했다”라는 식의 내용으로 뜯어고치려는 심리라는 것이다. 그는 “어디까지나 과거는 과거일 뿐, 과거의 일을 현재로 되돌릴 수는 없는 일 아닌가”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권고한다. 이 책에서 구로다 기자는 이런 질문을 한국의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반일에 올인하느라 어려울 때 의지할 수 있는 소중한 우방을 잃는 것이 과연 한국의 국가이익에 도움이 되는 길인가?”
그렇다면 과거사로 일본을 탓하기에 앞서 대한민국 스스로 반성할 점은 없는가. 툭하면 반일정서를 자극해온 정치권에 묻지 않을 수 없다. 일본의 수출규제에 ‘죽창 들고 맞서자’고 선동했던 것도 정치권이었다.
한일 양국은 아시아에서 자유민주주의 체제와 시장경제를 바탕으로 아시아와 세계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주요국가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활용 가치가 매우 높은 나라다. 우선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안보위협인 북핵문제 및 한·미·일 대북공조체제 강화를 위해서도 일본과의 협력은 중요하다.
한일 양국은 서로 군사동맹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한미-미일동맹을 매개로 긴밀히 연계돼 있다. 주한미군의 운영체계도 한반도 유사시에 한국·미국·일본 간에 한미연합사 및 주일미군사령부를 통해 긴밀한 군사방위협력이 이뤄지도록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미동맹을 기본 축으로 한반도의 안전을 지키는데 있어서 일본과의 협력은 불가피하다.
그동안 한일 관계를 짓눌러 온 강제 징용 문제는 ‘사법 자제’를 벗어난 ‘ 생애국적 판결’에서 비롯됐다. 2012년 대법원은 강제 징용 배상은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의해 소멸됐다는 종전 판결을 뒤집고 ‘청구권이 살아 있다’는 해석을 내렸다.
윤석열 대통령이 강제징용을 우리가 선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결심한 이유도 2012년 대법원 판결이 야기한 국내 사법 문제라는 인식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의 배 12척까지 소환하며 반일 마케팅에 열을 올렸던 문재인 전 대통령도 임기 4년 차엔 우리 법원 판결이 한일 관계에 부담을 준다는 입장을 밝혔다. 2021년 1월 신년 회견에서 “일본 징용 기업의 자산 현금화는 바람직하지 않다”고 했고 회견 며칠 전 나온 위안부 배상 판결에 대해 “곤혹스럽다”고 했다.
문 전 대통령은 뒤늦게나마 이런 인식을 가졌다면 징용 문제 해결에 나서야 했다. 그러나 그는 문제만 인정하고, 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문희상 국회의장이 대신 나서서 중재안을 냈을 때도 눈치만 보다가 여론이 심상치 않자 등을 돌렸다. 문 전 대통령의 무책임한 태도가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든 측면도 있다.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합의를 문재인 정부가 뒤집는 것을 보면서 일본은 한국 정부와의 합의는 언제든 물거품이 될 수 있다며 불신했다.
그런데 윤 정부의 강제징용 해법을 민주당은 ‘굴욕 외교’라고 비난한다. 이재명 대표는 “삼전도의 굴욕에 버금가는 최대의 치욕”이라고 했다. 자신들이 회피하고 떠넘긴 숙제를 대신 떠맡았는데 미안해하기는커녕 삿대질까지 한다. 그래서 묻고 싶은 건 그들에게 대안이 있느냐는 점이다. 징용 해법에 돌팔매질하는 야당과 시민 단체들은 피해 당사자들의 희생을 볼모 삼아 자신들의 반일 비즈니스를 이어가겠다는 얌체 짓을 하고 있다.
국가 간 외교, 특히 한일 관계는 많은 상반된 요소가 얽힌 난제다. 정부가 이 난제를 대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다. 칭찬받을 일도 없지만 욕먹을 일도 없다. 문 정권이 그렇게 했다. 민주당은 어려운 국가외교에 한줌 고민도 없이 오로지 헐뜯을 궁리만 하고 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책임이 있는 정부라면 일시적으로 국민 비판을 받더라도 한일 관계 개선을 통해 안보 경제 문제를 풀어야 한다.
도쿄에 벚꽃이 핀 16일 윤석열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상으로는 12년만에 일본을 방문해 기시다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한일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선언했다. 최근의 한·일 관계를 계절에 비유하면 ‘맹춘(孟春·초봄)’이라 할 수 있겠다. 봄은 시작됐지만, 냉기가 남아 있다는 뜻이다. 가끔 북서풍이 불면 꽃샘추위로 감기에 걸릴 수도 있는 환절기다. 두 나라 국민과 국익을 위해서도 완연한 봄을 재촉하는 견고한 노력을 양국이 함께 기울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