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이웃으로 살았던 옛 친구가 오랜만에 왔다. 그녀를 알고 지냈던 몇 사람과 함께 만나 브런치를 했다. 얼마 만에 가져보는 시간인지, 다들 십 수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며 반가워했다. 자주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래전부터 알던 사람들이어서 그런지 편안한 수다가 좋았다. 여자들이 모이면 요리 이야기는 약방의 감초처럼 꼭 들어간다. 요즘은 어떤 요리가 맛있는지, 어떤 식재료를 쓰는지에 대해 나누는 눈빛들이 반짝였다. 한 사람이 10년이 넘도록 직접 된장을 담아서 먹고 있는데 그 맛이 파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직접 된장을 담는다고? 그것도 이 미국땅에서? 뜻밖의 말에 나는 놀랍기도 했지만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다. “어렵지 않나요? 나도 할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된장 담글 항아리는 있나요?” “아! 있어요.” 그럼 됐다며 와서 도와주겠다고 했다. 때마침 얼마 전 한국으로 이사 가는 사람이 내게 항아리를 하나 주고 간 것이 있다. 된장 담기에 딱 알맞은 크기였다.
마침 내일이 메주 오는 날이니 내 것도 추가로 주문하겠다며 소금만 사다 놓으라고 했다. 다음날 나는 주문해 준 메주를 찾아서 깨끗이 씻어 놓았다. 능숙한 솜씨로 그녀는 메주를 잘게 잘라서 항아리에 넣고 소금물을 만들어서 부었다. 소금물의 농도가 가장 중요하다는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마른 고추와 숯을 띄운 뒤 메주가 소금물 위로 올라오지 않도록 눌러주라고 하며 40일이 지난 후 된장과 간장을 뜨면 된다고 했다. 아직 일은 남아 있지만 마지막까지 도와주겠다는 그녀에게 감사했다.
된장을 좋아하면서도 이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을 왜 시도조차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된장을 담는 일은 엄마와 할머니의 몫이라고 생각했나 보다. 선물 받은 항아리와 이웃집 여인 덕분에 된장을 담그고 보니 배부른 항아리처럼 내 마음도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햇살 좋은 날에 이젤을 마주하고 앉아서 항아리를 그리던 추억이 문득 떠올랐다. 여고시절 나는 친구들과 야외스케치를 많이 다녔다. 일요일이면 좋아하는 늦잠을 반납하고 새벽같이 일어나 양손 가득 화구들과 먹거리들을 들고 내 세상을 만난 것처럼 다녔다. 바다로 들판으로 산으로, 그중에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절이었다.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초보자들이 바다를 표현하고 들판의 곡식들과 시골집을 그리기에는 막막했던 것 같다.
반면 절에는 그림의 소재들이 많았다. 작은 오솔길과 나무와 기와 담장, 특히 돌담 옆에 자리 잡은 크고 작은 항아리들과 노란 들국화는 큰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수채화의 좋은 소재였다. 실력을 쌓기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고 그림의 만족감도 조금 더 채워 주었으니 자주 장독대를 그렸던 것 같다. 항아리는 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할 무렵부터 정물화의 소재도 되어 주었고 풍경화 속에도 많이 그려졌었다. 항아리는 둥근 선을 따라서 변하는 빛, 주변 사물의 비침까지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어서 지금도 입시생들에게 많이 그려지고 있는 소재이다.
항아리를 보면 모양도, 무늬도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기도 다양하다. 반들거리며 햇살에 반사되는 그 색과 빛도 다르고 볼록하게 나온 둥근 허리 모양들도 다르다. 우리는 흔히 항아리가 숨을 쉰다고 하며, 그 공기구멍을 통해서 보온과 보습을 하게 된다고 한다. 항아리는 각 지역의 기후에 맞춰 모양도 달라지고 장을 담그는 방법도 달랐다고 하니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과학적이고 지혜로웠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막상 된장을 담가보니 많은 것들이 새롭고 소중하게 나의 마음에 와 닿는다. 장독대를 정성스럽게 닦아주던 엄마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 손길을 느끼며 숨 쉬고 숙성되어 가는 장들의 향에 든든해 하셨을 엄마의 마음도 느껴진다. 고향 같은 포근함이 느껴지는 항아리를 보고 있으니 그 은은하고 넉넉한 생김새가 더없이 정겹게 다가와 기억에도 없는 할머니의 품속을 생각나게도 한다.
오늘따라 진득하게 앉아서 인내할 준비가 되어있는 항아리의 자태가 유난히 빛나 보인다. 맛보게 될 어릴 적 엄마의 향기가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