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에 사는 루지아(26)는 최근 데이트 상대에게 바라는 점부터 ‘데이트 아이디어’까지 적은 여섯 쪽의 ‘구글 독스(Google docs)’ 문서를 만들어 소셜미디어(SNS)에 올렸다. 그는 “지금까지 이 문서로 두 번의 데이트를 했다. 실제 효과가 있었다”고 전했다.
#미국 뉴욕에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코니 리(33)는 지난해 남자친구와 이별한 뒤 다시 데이팅 앱에 가입했다. 하지만 연락한 많은 남성은 가벼운 만남을 원하는 것 같아 실망했다. 리는 우연히 온라인에서 장문의 ‘연애 자기소개서’를 본 뒤 비슷한 형식의 문서를 작성해 SNS에 게시했고 이후 총 15번의 데이트를 했다.
미국과 영국에서 유행하는 데이트 문서를 두고 뉴욕타임스(NYT)는 “새로운 트렌드지만 과거의 유물인 1000자 정도의 개인 신문광고와 비슷하다”고 전했다. 코니 리는 “데이트 문서는 데이팅 앱 시대에 매력적인 로우테크(low-tech·하이테크의 반대 개념)인 것 같다”라고 말했다.
흡사 이력서처럼 보이는 데이트 문서는 특히 미 실리콘밸리의 기술업계 종사자나 주요 대도시 거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데이트 문서를 작성하는 시간은 데이팅 앱보다 오래 걸리지만 만남 방식은 간단하다. 틱톡·인스타그램·X(옛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에 ‘보기 전용 문서’로 데이트 문서를 올려 홍보하는 것이다. 문서엔 다이렉트 메시지(DM)나 메일 등 연락 방법도 기재한다.
틴더에 ‘피로감’…‘데이트 문서’ 뜬다
미 MZ세대 사이에서 데이트 문서가 확산하는 이유는 데이팅 앱에 대한 피로감 때문이다. 일회성 만남이 잦고 의미 있는 관계를 쌓지 못한 경험이 쌓인 결과다. 틴더 같은 데이팅 앱에서 몇 시간 데이트 상대를 찾아야 하고, ‘매칭’이 돼도 막상 만나보면 원하는 모습과 다른 사람이 나온다.
가짜 계정(fake account)도 증가하고, 각종 악용 가능성에 불안감도 커졌다. NYT는 “데이팅 앱을 사용한 50세 미만 여성 중 약 3분의 2는 신체적 위협을 받았거나, 원치 않는 성적 메시지나 이미지, 욕설을 들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일부 이용자는 ‘번아웃(Burn-out)’까지 경험했다. 미 여론조사기관 퓨(pew)리서치센터에 따르면 18-54세 미국인의 약 80%가 데이팅 앱을 이용할 때 정서적 피로감이나 번아웃을 느꼈다고 답했다.
미 CNBC 방송은 데이팅 앱 사용자들이 “모두 지친 상태”라고 전했다. 이로 인해 미국에서 데이팅 앱의 사용량은 줄고 있다. 미 데이터 분석 업체 시밀러웹에 따르면 지난 1월 주요 데이팅 앱의 평균 트래픽 사용량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2% 줄었다. 투자은행 모건스탠리는 “코로나 이후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던 데이팅 앱의 ‘신혼여행’이 끝날지도 모른다”고 전망했다.
독일 도이체벨레(DW)는 “데이팅 앱의 잦은 사용이 우울증과 불안, 자존감 저하에 빠질 수 있게 한다”며 “11년 전 틴더의 등장은 연애 시장의 ‘혁명’이었지만 많은 이용자가 이 앱을 불편하게 여기고 정신 건강에 해를 끼친다고까지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데이트 문서는 이런 데이팅 앱 부작용의 ‘해독제’로 주목받는다. 작성자들이 말하는 주요 장점은 세 가지다.
①인연을 찾는 데 진지하다
800~1000개 단어로 쓰인 데이트 문서를 쓰다 보면 스스로 데이트 상대를 만나는 것에 대해 진지해진다. 데이트 문서를 읽는 사람도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만큼 비슷한 태도를 가져 서로 맞을 확률이 높아진다.
②원하는 만큼 까다로워질 수 있다.
상대에게 원하는 것과 절대 원하지 않는 것을 모두 적을 수 있다. 정해진 질문에 제한된 단어 수로 답할 수 있는 데이팅 앱보다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적을 수 있는 게 데이트 문서의 또 다른 장점이다. 영국 옥스퍼드에 사는 타넷(33)은 진지한 연애를 위해 취향과 가치관을 묻는 20가지 질문에 답해야 프로필을 올리는 ‘힌지(Hinge)’앱에 가입했지만 이내 데이트 문서로 돌아섰다. 타넷은 “키나 별자리같이 힌지 앱의 사전 질문보다 ‘육아 철학’, ‘좋아하는 비디오 게임’이 자신에겐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만 틱톡에 올린 일부 데이트 문서에는 상대방의 고용 상태와 신분증 사본을 요구하기도 한다.
③잡담을 생략할 수 있다.
“여행 좋아해요?” 대신 데이트 문서에 상대방이 여행을 좋아한다고 적어놓았다면, ‘여행 경험담’을 바로 물어볼 수도 있다.
구글 문서(Google Docs)로 만든 데이트 문서.
데이트 문서의 한계도 뚜렷하다. 데이팅 앱보다 만남 성사 자체는 적은 편이다. 원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많이 적다 보니 이에 맞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 데이트 전문가 제시카 잉글은 “데이트 문서 방식의 만남을 참여하는 사람 자체가 적으니 실제 문서에 일치하는 사람을 만날 횟수도 적다”고 말했다.
개인 정보를 너무 많이 공유해 문제가 될 수도 있다. 인공지능 연구원인 그레이스(36)는 “문서를 올린 뒤 약 100개의 응답을 받았지만 (자신의 취향에 대한) 비판적인 메시지도 있었다”고 털어놨다.
문상혁(moon.sanghyeok@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