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을 떠날 적마다 시집 한권을 가지고 간다. 외지에서 잠 자기전에 읽는 시 한편은 수면제이다. 지난번 나들이에 미국시인 칼 샌드버그의 시집을 가져갔지만 페이지 한번 넘기지 못했다. 집에 돌아와 가방을 풀다가 시집 뒷 커버에 프린트된 시 ‘안개’를 읽었다. ‘안개는 작은 고양이 걸음으로 다가와/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항구와 도시를 굽어보다가/ 이윽고 어디론지 떠나간다’ 여전히 신비하다.
처음 영어를 배우던 중학생 시절 나와 샌드버그 시인의 인연은 이 시로 시작됐다. 영어 단어가 많은 글 보다는 짧은 글을 선호했던 그때, 샌드버그 시인의 시 ‘안개’를 사전의 도움으로 읽었지만 뜻은 제대로 몰랐다. 세월이 지나 미국으로 이민오고 영어로 밥을 벌어 먹어야 해서 죽자고 영어를 공부한 후 그의 시를 다시 찬찬히 읽었다. 긴 시구절도 사전 없이 읽을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고 삶의 나이테가 둘러지면서 시인의 시어에 함축된 의미를 이해했다. 솔직 담백한 일상의 언어로 사회상과 이념을 시로 승화시킨 그 사이사이에 끼인 상념의 줄기에서 겸허한 삶의 지혜를 배웠다.
언젠가 샌드버그 시인이 살았던 집을 찾아 갔었다. 노스캐롤라이나의 아름다운 작은 마을, Flat Rock에 있는 그가 살았던 집, 코네마나는 그의 기념관이다. 그의 집 입구에서 시인의 여러 표정을 사로잡은 거대한 사진과 마주 섰을 적에 오랜 독자인 동양여자를 소탈하게 웃으며 맞는 시인의 정겨움에 내 긴장이 풀렸다. 호수를 낀 오솔길은 푸른 하늘에 나무와 물이 어울려 평안이 가득했다. 시인이 22년을 살다 세상을 떠난 그의 집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올라가며 그의 체취를 찾았다.
언덕위의 하얀 집, 코네마라 앞에서는 가슴이 설렜다. 시인의 집은 동서남북으로 창이 많았다. 눈이 부시도록 싱싱한 들판을 앞으로 멀리 구비구비 산등성이로 하얀 구름이 나른한 호젓함이 가득했다. 시인이 세상에 발표한 작품의3분의 1 이상을 이 집에서 썼다는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창밖으로 흩어진 눈길을 집안으로 모았다. 묵묵히 책상을 지키는 낡은 타자기와 집안 곳곳 벽을 채운 책들에 그의 혼이 있었다. 어느 방향으로나 팔을 뻗치면 책을 집을 수 있도록 많은 책 속에 그는 스토리로 남았다.
창밖 새들의 노래는 기타를 치며 포크 송을 부르는 시인의 음성같이 감미로웠다. 부드러운 화음이 구슬처럼 집안으로 굴러들어와 언어가 비운 공간을 자유자재로 들락이며 영원을 노래했다. 그날 살아있는 생명은 언젠가는 사라짐을 받아들이며 언덕아래 호숫가의 벤치에 앉아서 샌드버그 시인에게 많은 시상을 준 산등성이를 구비구비 돌아온 바람의 구수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남편을 위해 노란 스티커에 ‘안개’ 시를 적어서 컴퓨터 테이블 옆 벽에 붙여 뒀다. 가끔 남편은 그 시에 눈길을 준다.
단발머리에 빳빳한 하얀 컬러를 붙인 검은색 교복을 입고 다니던 시절부터 검은 머리가 하얗게 변해가는 지금까지 나는 시인과 대화한다. 바람 많은 도시 시카고에서 그 도시와 사람들을 사랑했던 시인의 시 ‘시카고’ 가 미시건 호숫가에 머물어 있음을 봤다. 그리고 여행지 어떤 미술관 기념품 가게에서 그의 사진이 선명한 카드를 발견했다. 그날 가게에 있던 카드를 모두 사서 문학을 좋아하는 지인들에게 특별한 선물로 보냈다. 그의 아름다운 시가 지인들의 삶에 향기를 보태기를 바랬다.
더우기 내 이웃에 버펄로들이 살았다. 그들을 볼 적마다 차를 세우고 샌드버그 시인의 ‘버펄로 더스크’를 암송했다. 변하는 세월따라 모두가 변한다는 사실은 잊고 그저 동물들의 느릿한 움직임에 나도 멈추고 싶었다. 초원을 달리지 못하고 도시안에 갇힌 버펄로의 비애보다 나는 야생동물과 공존하고 있음에, 우리가 생생하게 살아있음에 좋았다. 하지만 버펄로의 숫자들이 줄어들더니 어느 날부터 한 마리의 버펄로가 외롭게 들판을 지켰다. 사슴들과 들판을 서성이던 그 한 마리도 요즈음 보이지 않는다. 이젠 잡풀이 무성한 들판을 보며 시를 읊으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시를 통해서 자연과 사람의 순리를 찾아 나도 자유롭게 방랑한다. 그리고 삶이 나를 속일적마다 시인들이 세상을 향해 열어 놓은 문을 통해서 위안과 기쁨을 받는다. 무엇보다 칼 샌드버그 시인을 만난 인연으로 내 삶이 풍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