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타는 희귀한 동물이다. 물없이 오래 견디는 습성도 신기하지만 단지 그것 만으로 희귀하다 하지는 않을 것이다.
낙타의 이동경로를 보면 원래 그들이 있던 곳은 추운 북극의 어느 곳이었다고 한다. 태생이 추운 곳인데 우리는 지금 뜨거운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들을 보고 있다. 북극과 사막의 이어짐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고도 남는다.
태생의 평범치 않음은 식성으로도 이어진다. 억센 가시로 뒤덮인 선인장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맛있게 먹어 치운다. 피가 주루룩 흐를 것 같아 마음 졸일라 치면 한아름 벌린 입 사이로 억센 아귀의 옆 돌기가 보이면서 비로소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된다.
그 뿐인가 한번에 들이 마시는 물의 양이 100리터는 족히 된다고 하니 옛 사람들은 낙타를 보고 아귀가 들린것 같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것이다.
식성이 이러한데 성질은 괜찮을지 궁금해진다. 뜨거운 사막에서 사람들을 실어 나르고 대상들의 무거운 짐을 옮기며 심지어 전장에서는 무기를 등에 얹고 최전선에 배치되기도 했다니 얼핏 순종적이고 온순해 보인다. 이런 것들이 특이하기는 하나 정작 내가 희한하다 느낀 건 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귀하고 유용한 동물이기에 사람들은 밤이 되면 낙타의 발목에 끈을 묶어 나무나 고정 된 곳에 묶어 놓는다고 한다. 처음 묶인 낙타들은 움직이려 애를 쓰지만 조금 지나면 묶인 끈을 풀어도 움직이지 않고 묶여 있는 듯 가만히 있는다는 것이다. 어쩜 그리 어리석을까 하고 무시할라치면 깜짝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내내 인내하고 순한 눈을 꿈뻑이다 어느 순간 화가 치밀어 오르면 자칫 목숨을 잃게 되는 치명상을 입히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주인들은 그런 순간이 올 것 같으면 얼른 자신의 옷을 벗어 던져준다고 한다. 그 옷을 낙타는 미친듯이 밟고 던져 버리면서 자신의 화가 풀릴때 까지 난장을 피운다. 실컷 꼬장을 부리고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얌전한 낙타로 돌아 온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낙타의 스트레스 해소법인 것이다.
이런 과격한 스트레스 해소법은 인간에게서도 볼 수 있다. 마약 복용이나 병적 과소비, 도박이나 알콜 중독, 트라우마로 인한 비윤리적 행동들 모두 자칫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낙타 주인과 같이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는 안전기재가 없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로 평생을 후회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르는 것이다.
안전기재는 완충지대 같은 곳으로 위험을 상쇄시키는 역할을 하는데 그것은 반려자이거나 부모님 또는 친한 친구 등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우리는 수많은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지만 또 많은 안전기재를 갖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왜 낙타는 발목의 끈을 풀어줘도 도망가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 것이다. 한 발을 내딛기가 두려워서 일까 아니면 이대로가 더 편하기 때문일까. 누구나 현재의 안락함에 안주하고 싶을 것이다. 설사 지금이 편안하지 않더라도 투지를 불태우며 앞으로 나가려는 시도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움직였다면 치명상을 입히는 미친 난장판을 벌이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는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났다. 자신의 틀에 갇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현실과의 괴리로 인한 스트레스를 풀어내기 위해 많은 댓가를 감수하는 보통의 삶. 우리네 모습이 낙타의 움직이지 않는 길다란 다리에 얹혀졌다.
다행히 우리에게는 안전기재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조금의 방심으로도 우리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남에게 기대는 안전기재는 차선책인 것이다. 낙타가 아닌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스스로가 먼저 조금의 숨트임이라도 만들어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나가지 않도록 발란스를 맞춰주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살았다. 많은 말들, 해야 했던 행동들이 뿌듯함으로 다른 한편에는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 한편을 볼까 아니면 편안한 음악에 몸을 실어볼까… 자리에서 한걸음 나아가 시원한 바람을 들이키며 풀어진 끈을 밟고 있는 나를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