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2)
한국의 첫눈은 보통 11월 중순에서 12월 초 사이에 내린다. 첫눈, 첫날, 첫사랑, 첫 만남… 모든 처음은 풋풋하고 설렌다. 특히 첫눈과 첫사랑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느낌이 통해서 그런지 첫눈이 오면 자신도 모르게 첫사랑이 떠 오르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 이것은 정호승 시인의 〈첫눈 오는 날 만나자〉라는 시의 한 부분으로 첫눈의 의미를 곰곰 되새기게 해준다.
첫눈 뿐 아니라 하얀 눈이 좋은 까닭은, 온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면 그 위에 나만의 새로운 세상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첫눈이 내리면 이제 시린 바람을 맞으며 빙판길을 걸어야 하는 겨울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지만 송이송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겨울이 참 아름답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그림책 〈First Snow〉은 한국의 박보미 작가가 처음으로 쓰고 그린 그림책이다. 표지 그림부터 그림 한쪽 한쪽을 오려 벽에 걸어두고 싶을 만큼 예쁘다. 작가는 오랫동안 크리스마스 카드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눈 내리는 밤 풍경이 산타를 기다리는 크리스마스 밤처럼 고요하고 평화롭다.
잠자던 아이가 눈을 뜨고 눈 오는 창문을 바라본다. 아이는 하얀 털모자를 눌러 쓰고, 빨간 목도리를 두르고 밖으로 나가 동글동글 눈송이를 뭉쳐서 굴리기 시작한다. 마을을 지나, 들판을 지나, 숲속을 지나 하얀 눈 세상으로 들어간 아이는 온 세상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눈사람을 만든다. 아이가 꿈을 꾼 것인가?… 눈송이처럼 아이들이 하늘로 떠오르고, 아이는 다시 꿈나라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아이를 따라 다니던 강아지만 잠든 엄마 개 옆에서 빨간 목도리를 두른 눈사람과 장난치고 있는 고요한 밤, 하얀 눈이 마당에 소복소복 내린다.
첫눈을 보며 설레어 하는 아이의 순수한 마음과 여러 친구들과 함께 놀고 싶은 아이의 바람이 구르는 눈송이처럼 커져가는 것을 그림에서 느낄 수 있다. 글자가 아주 조금 뿐인 그림책이라 그림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느낌이 더 선명하게 다가와서 좋다. 이렇게 그림이 모든 것을 보여주지만, 눈 내리는 풍경 사이사이에 눈송이 모양 송이송이 박힌 글들도 정말 사랑스럽다.
‘소록소록 소르르, 동글동글 톡톡톡, 달빛아래 폴폴, 밤새도록 소복소복’으로 표현된 한글책과 ‘Pit pit pit against the window, Pat pat pat-Roll roll roll, Beneath moon, Fast fast fast-Slow slow slow’로 번역된 영어책을 같이 보면서, 한글이 얼마나 사랑스러운 글인지 이제야 처음 알았다는 듯이 설레고 흐뭇했다.
이 책의 한글책 표지는 하얀 눈밭에서 커다란 눈뭉치를 굴리는 아이의 모습이고, 영어책 표지는 깜깜한 밤에 홀로 조그만 눈뭉치를 만드는 아이의 모습으로 책표지가 다르게 출판되었다. ‘눈이 온다’와 ‘눈이 내린다’는 같은 말이지만, 왠지 모르게 ‘눈이 온다’고 하면 더 간절히 눈을 기다린 것 같은 느낌처럼 책표지의 그림도 하얀 눈의 느낌을 그대로 살린 한글책과 검은색과 흰색을 대비시켜 흰색을 강조한 영어책 표지가 왠지 다르게 느껴진다.
왠지 다른 느낌, 그 느낌을 말이나 글로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는 확실히 다르게 알 수 있는 느낌, 이런 게 통하는 사람들만이 공유하는 정서가 아닐까? 가족끼리만 통하는 정서나 어떤 민족이나 나라에서만 통하는 정서가 있다. 이런 정서는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대물림되기도 한다. 첫눈에 첫사랑처럼 아름답고 따뜻한 느낌을 담아 대물림하려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눈송이처럼 많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