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속에 서류를 찾다가 우연히 봉인된 편지 4통을 발견했다. 뭐지? 아빠, 엄마, 아이들의 이름이 쓰인 편지봉투가 그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던 것이었다. 어느 해인가 우리 가족이 각자 자신에게 편지를 쓴 뒤 일 년 뒤에 열어서 보기로 하고서는 잊고 있다가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다.
오래전에 지인이 연말이면 한 해를 보내면서 가족들과 나눔을 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다. 정해진 날에 어느 정도의 형식을 갖춰서 진지한 시간을 갖는다고 했다. 일년 동안 좋았던 일, 힘들었던 일, 서로에게 바라는 일들을 나누고, 지난해에 세웠던 계획을 얼마나 잘 실행했는지에 대한 일들을 이야기한다고 했다. 그런 나눔이 다 끝나면 새해의 다짐과 계획들을 각자가 편지지에 써서 봉인한 뒤 다음 해에 개봉한다며 해마다 하다 보니 서로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일이 더 깊어지는 것 같아 좋았다는 말을 했다.
멋진 아이디어를 얻은 느낌에 우리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리 가족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춘기가 된 중, 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과 갑자기 시작하는 게 쉽지가 않겠지만 시도는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어색해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나누는 시간이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안고 제안을 한 뒤 첫 번째 자리를 만들었다.
남편도 아이들도 좋은 시도라고 이해하는 것 같았지만 굳이 이런 형식이 필요할까 하는 표정이었다. 그럼에도 한 해를 돌아보며 조금은 어색한 소통을 시작했고 나눔을 했었다. 편안한 공간에서도 진지하고 진솔한 속내를 열기가 그리 쉬운가. 하물며 앞장섰던 나도 매끄럽지 못했으니 다들 불편도 했겠지만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기억이다. 마지막 각자 자신에게 하고픈 약속들을 글로 써서 봉투 속에 고이 모시는 것까지 우리는 마무리했다. 내년 이맘때를 다시 약속하면서 말이다.
다음 해에는 서로가 나눌 것도 미리 준비하고, 편지 속에 들어있는 자신에게 한 약속들에 대해서도 나누기로 했다. 잘 지켜진 것들과 잊힌 것들에 대한 이야기도 하면서 다음 해를 응원했다. 그 뒤에 한 두해 정도 더 시도를 했지만 아쉽게도 이어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썼던 편지들이 세상 구경도 못하고 십년이 훨씬 넘게 숨어있다 나타난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왜 그만두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적극적이지 않은 우리 가족들의 성격도 한몫 했을 거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속하지 못한 것이 내 인내와 준비부족 아닐까 싶기도 하다. 남편과 아이들에게 오히려 스트레스를 주는 것 같기도 했고, 큰 아이가 연말에 친구들과 여행 가면서 흐지부지 되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계속하지 못한 것에 후회가 된다. 시작이 늦었다는 생각보다는 좀 더 노력하고 계속 시도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아쉬움이 크게 든다. 아이들 각자가 자리를 잡고 떠나기 전에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이해하고 소통하는 통로가 되어줄 길을 가다가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다. 조금 더 일찍 알고 어릴 때부터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미련도 생긴다. 꾸준히 했다면 차곡차곡 모인 자신에게 쓴 편지들은 가족들의 성장일기가 되었을 것이다. 서로를 단단하게 묶어주는 값진 사랑의 끈이 되었을 것이다.
한참동안 묵히며 잠들었던 편지의 등장은 지금까지 내가 새해를 준비해 왔던 일들을 돌아보게 했다. 습관처럼 반복되었던 것은 아닌지, 늘 하는 연례행사처럼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짚어보게 된다. 오래전의 내게 쓴 편지를 보면서 한 해를 또다시 정리하게 된다.
올해는 남편과 둘이 다시 시작해 보는 건 어떨까. 거창한 형식을 빼고 약간의 진지함을 곁들인 특별한 시간과 익어가는 황혼의 서로를 응원하는 건 어떨까. 한 해를 보내며 남편에게 감사의 편지를, 새해를 시작하며 나에게 하는 약속의 편지를, 소중한 사람들에게 감사와 사랑의 마음 한가득 담긴 편지를… 욕심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