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23)
어릴 때, 물가에서 놀다가 미끄러져 깊은 물속에 빠진 적이 있다. 물속은 너무 고요했다. 좀 전까지 떠들썩하던 친구들의 말소리도, 뜨겁게 울던 매미소리도 모두가 사라진 곳에 나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지나던 어른이 끌어 올려주기까지 잠시였지만, 그 느낌이 너무 강렬해서 잊히지 않아 오래 생각하다가 ‘나는 고독하다’라고 일기장에 썼다. 그리고 일기장을 검사하던 선생님께 “쪼맨한 게, 니가 고독이 뭔 줄은 아나?”하는 핀잔과 알밤 한 대를 맞았다. 그때 내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고독’이라는 말을 쓸 때면 흘깃흘깃 눈치를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림책 〈Garmanns Sommer〉은 노르웨이 작가 스티안 홀레의 작품이다. 책표지에는 주인공 가르만이 수영 팔튜브를 차고, 이해하기 힘든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이 그림책은 콜라주 기법을 활용하여 인물들에 실재 사진을 붙여 아주 현실적인 표정을 보여준다. 그런데 표정들이 그림보다 더 낯설고 괴기스럽기까지 하다.
가르만은 다가오는 가을에 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두려운 여섯 살이다. 같이 입학할 예정인 이웃의 쌍둥이 자매들은 이가 네 개나 빠졌고, 자전거 타기, 울타리 위에서 걷기, 물속에 머리 넣기, 읽고 쓰기도 할 수 있는데 가르만은 되는 게 하나도 없다. 가르만 집에는 여름마다 여름나기를 위해 오시는 세 할머니가 계신다. 류마티즘과 탈장이 있는 할머니들은 언제나 방울달린 손뜨개 털모자를 가르만에게 선물로 주신다.
포장지 속 선물이 무언지는 꾸러미를 풀지 않고도 알지만, 가르만은 할머니들을 이해할 수 없다. 자신은 키가 커가지만 할머니들은 거꾸로 햇빛에 쪼그라드는 것 같고, 아무리 흔들어 봐도 빠지지 않는 가르만의 이와 다르게 할머니들은 이가 하나도 없어 틀니를 낀다. 학교에 입학하는 기분을 “뱃속에서 나비들이 팔랑거리니?” 하고 이상한 말로 물어보는 할머니들도, 세상에 두려운 것이 있는지 가르만은 궁금하다.
“나도 겁나는 게 있단다. 이제 곧 외출할 때마다 노인용 보행기를 써야 할지도 몰라.”라고 루트할머니가 대답하자, 가르만은 “그럼 내 스케이트보드를 빌려 드릴게요.”라고 말한다. 이렇게 할머니와 가르만의 대화는 세대 차로 인한 표현의 차이와 부조화를 보여준다. 죽으면 하늘을 날아 북두칠성을 지나 아름다운 정원으로 갈 거지만 “나는 너와 헤어지는 게 겁이 나.”하고 말하는 할머니. 겨울하면 눈사람, 눈썰매, 따뜻한 코코아가 떠오르는 가르만과 다르게 눈 치우기와 미끄러운 길을 뒤뚱거리며 다닐 일이 두렵기만 하다고 말하는 할머니.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해서 걱정이 없는 것 같은 할머니.
자신만 알고 있는 비밀정원에서 땅바닥에 떨어져 죽은 새한마리를 발견한 가르만은 새를 성냥갑에 넣어 땅에 묻고 막대기로 십자가를 만들어 세운다. 할머니들이 얘기하는 소리, 웃음소리, 커피 잔 부딪히는 소리를 들으면서 ‘사람이 죽으면 북두칠성을 지나 하늘나라로 떠나겠지. 하지만 우선 지렁이가 사는 땅에 묻혀 흙이 되어야 해.’라고 가르만은 생각한다. 할머니들은 배를 타고 떠나고, 내일 입학해야 하는 가르만은 여전히 두려워하며 가방을 챙긴다.
이 책의 제목은 한국에서 〈어른이 되면 괜찮을까요?〉로 번역되어 출판되었다. 제목을 보자마자 “아니요!”하고 바로 대답하게 하면서, 아이의 어른에 대한 동경이겠구나 하며 책 내용을 짐작하게 된다. 인간은 앞으로의 일을 알 수 없고, 지구가 도는 한 변화는 계속되고, 그래서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안한 존재이다. 가르만처럼 어느 어른을 잡고 물어도 대답은 ‘어른도 두렵다.’일 것이고, 어른도 두려워한다는 것을 안다고 아이의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저 두려움을 이겨내며 꾸역꾸역 걸어가야 하는 삶의 의미를 알아갈 것이다. 두렵지만, 왜 낯선 세상으로 나가야 할까?
‘할머니들은 뜰이 예쁘다고 칭찬하며, 함께 손뼉을 치며 수다를 떨고, 이 꽃 저 꽃 날아다니는 벌처럼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어.’ 이렇게 ‘함께’에서 그 의미를 찾아야 하지 싶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불안하고 또 고독한 존재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