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 위기·전쟁 등 달라진 재난 양상에 새 구호 전략 수립·국제적 지원체계 재정비 나서
5만 6000여 명이 사망한 튀르키예 강진과 역사상 최악의 산불로 기록된 하와이 마우이섬 참사에 이르기까지 지난해 전 세계는 극심한 기후 재난에 시달렸다. 이스라엘과 하마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등 중동과 유럽에서 발발한 두 개의 전쟁은 해를 넘기며 지정학적 불안을 가중시키고 있다. 지구촌 곳곳에서 인도주의 위기가 심화되고 있는 가운데 우리는 필요한 곳, 필요한 시간에 의약품이 공급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본부를 두고 있는 ‘맵(MAP) 인터내셔널’은 인도주의적 지원이 필요한 곳에 의약품을 공급하는 국제구호기관이다. 1954년 문을 열어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동안 7억 4537만 달러에 해당하는 의약품을 전달하고, 6070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했다. 경제 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미국 100대 자선단체 중 모금 효율성과 자선 활동 영역에서 거의 만점에 가까운 99점을 기록, 29위에 올랐다.
한인 스티브 스털링 CEO(최고경영자)가 이 구호단체를 이끌고 있다. 제약회사 브리스톨 마이어스스큅(BMS)을 거쳐 헤퍼인터내셔널, 월드비전US 등의 국제적인 구호단체에서 일한 경험을 바탕으로 2014년 대표를 맡았다.
전쟁의 후유증이 채 가시지 않은 1956년 한국에서 태어난 그는 두 살 때 소아마비 장애를 앓아 하반신이 마비됐다. 장애와 가난 때문에 여동생과 일산 홀트아동복지원에서 자랐다. 보조기구 없이 걷지 못해 기어다니는 그를 놀리고 때리며 괴롭히던 아이들로 가득한 환경을 견뎌내야 했다.
희망이 보이지 않던 그의 삶을 바꾼 건 ‘사탕 한 알’이었다. 그의 여동생이 아동 입양을 위해 복지원을 방문한 스털링 부부의 눈에 띄었을 때의 일이다. 부부가 건넨 사탕 하나를 오빠에게 주려고 뛰어가는 아이의 모습에 감동해 부부는 오빠도 함께 입양하기로 결정했다. 부부는 당시 해외 아동 입양을 두 명으로 제한한 연방법을 고치려 의원에게 편지까지 쓰며 기어코 아이들을 미국으로 데려왔다. 5살 되던 해, 미국인 아버지는 ‘명수’이라는 한국 이름 대신 가장 친한 친구 중 하나의 이름을 따 ‘스티브’로 바꿔주었다.
스털링 대표는 어린 시절 받은 사탕 한 알을 전세계 여성과 아동, 요양시설의 고령 환자들에게 의약품으로 갚고 있다.
그는 또 올해 “미국 중남부의 허리케인처럼 특정 재해가 반복적으로 발생하는 지역을 대상으로 국가별, 재난별 상황에 맞는 의약품 지원 매뉴얼을 개발해 협력국들의 지원체계를 보다 공고히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전과 달라진 재난은 달라진 대응을 요구한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재난의 속도가 빨라질수록 대응도 빨라져야 한다.
지난달에는 새로운 50년을 준비하며 브런즈윅에 있는 기존 시설보다 두 배 큰 의약품 보관 및 유통 시설을 새롭게 열었다.
스티브 스털링 맵(MAP)인터내셔널 대표가 지난 12월 브런즈윅 새 공장 개소식에서 소감을 말하고 있다.
“지금은 세계적 보건위기…무관심이 가장 큰 문제”
국제적 구호노력에 국가 이기주의 가장 큰 걸림돌
가자지구 난민 지원도 네덜란드 경유해 물자 지원
난민의 고통 공감하고 함께 아파하는 관심이 중요
스티브 대표는 11살 때인 1966년 미국 가정에 입양된 뒤 기적에 가까울만큼 다른 인생 행로를 걷게 된다. 코넬대와 노스웨스턴대 MBA를 거쳐 대형 제약업체와 식품회사 등에서 경력을 쌓았다. 장애아로 입양됐으나 이제는 “사랑으로 극복할 수 없는 장애는 없다”고 자신한다. 그는 2014년 대표 취임 당시 “만약 내가 어렸을 때 소아마비 백신을 맞았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에게 의약품을 지원하는 맵 인터내셔널의 구호 활동이 그에게는 소명으로 받아들여졌다.
-기후위기와 전쟁과 같은 대형 재난이 더욱 빈번해지고 있는데 그에 대응한 MAP 인터내셔널의 구호활동은
“지금은 세계적 보건위기다. 전쟁이 전면전 양상을 띠며 민간인의 필수 생활 물자도 차단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단순히 의약품이나 치료만 제공해서는 생존을 담보할 수 없다. 따라서 파트너사와의 협력범위를 늘려 비누와 같은 위생용품 키트도 함께 준비한다.”
-예전과 달리 구호활동 자체가 어려워지고 있는데
“코로나19 백신 공급 병목현상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듯이 의약품에 대한 국가 이기주의를 해결하는 것이 장기 과제다. 당장 급한 타국의 인도적 의료 위기 앞에서 당국의 사전 허가를 받거나 의약품 지적 재산권을 먼저 보호하라는 것이 답답한 관료주의의 한계다. 가자지구 팔레스타인 난민을 도울 때도 네덜란드 등을 경유해 물자를 지원했어야 했다.”
-구호 활동에서 특히 중점을 두는 부분은
“여성과 아동, 요양시설 환자들에 대한 접근이다. 이들은 가장 먼저 다치고, 가장 늦게까지 도움을 받지 못한다. 현장에서 이들을 먼저 치료하려고 노력한다.”
-비영리 민간 구호단체로서 재정적 어려움은 없는지
“혼자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정부 지원을 받지 않고 후원금으로만 재정을 충당하고 있다.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미국인의 60%가 재난상황시 도울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도우려는 사람들로 가득 찬 커뮤니티는 공적 재난 대응 시스템의 빈틈을 메우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조지아의 한인교회나 학교에서도 봉사와 물품 기부를 자주 받고 있다.”
-구호단체의 CEO로서 커뮤니티에 당부할 말이 있다면
“IT(정보기술)가 발달하면서 언제, 어디서 재난이 발생할 지 기술적으로 예측하는 것과 대응이 비교적 쉬워졌다. 연례 수급 계획을 미리 정하고 인력과 의약품을 배치해두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들의 관심이 없어질 때다. 고난을 겪는 이들을 보고 오래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뉴스는 3분마다 바뀌지만, 아픈 이들은 계속 그곳에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고 당부하고 싶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