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푸른 용의 해가 날아 왔다. 친구가 보내 온 디지털 연하장에는 넘실대는 푸른 용이 있었다. 용을 그리지는 못하겠지만 마음을 머금은 푸른색으로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색을 찾아도 내가 생각하는 푸른 색이 찾아지지가 않았다. 문득 만년필과 그 푸른 잉크가 떠올랐다.
비상하는 용의 몸체사이로 베어 나오는 푸른 빛의 여운과 움틀거림에서 만년필 고유의 잉크로 쓰여진 글자들의 움틀거림이 연상되었다. 둥글게 휘말려 굵게도 가늘게도 똬리 틀은 용의 몸 놀림은 마치 주인의 손놀림에 따라 수시로 변화를 만들어 내는 글자의 모양처럼 때론 굵게 때론 가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익살스럽게 치켜 뜬 용의 푸른 눈동자는 어쩌다 잘못 뭉쳐진 굵은 잉크 방울처럼 가슴에 스며 들었다. 한번 스며든 푸른 설레임은 오래 전 느꼈던 펜촉의 감각을 새롭게 느끼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했다.
내가 처음 만년필을 만난 건 입학 선물을 받은 날이었다. 그 당시 유행했던 파카 브랜드로 묵직한 푸른 빛이 도는 제품이었다. 하지만 몽글거리는 몸체에 중후한 돌림 뚜껑이었다는 기억만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연필이나 볼펜에 익숙했던 그 시절 만년필이란 것은 나에게 너무나도 불편했기 때문이다. 수시로 채워줘야 하는 잉크와 손에 묻어나는 번거로움, 매끄럽게 써지기 까지의 시행착오와 까다로운 종이와의 맞춤 등 마치 까탈스런 연인을 대하듯 조심스런 마음이어서 편하게 다가갈 수가 없었다. 결국 케이스에 곱게 넣어져 책상 어느 서랍엔가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직도 코끝에 느껴지는 잉크 냄새의 낭만과 유리병 속에 담긴 펜촉의 기다림, 날개깃이 달린 펜대의 설레임이 만년필 속에 담겨져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일상의 무게는 느긋하게 푸른 잉크를 채울 여지를 쉽게 내주지 않았다. 디지털이 대세인 시대에 맞춰 살다 보니 어쩌다 들여다 보는 지나간 사진과 같은 아련함으로만 만년필에 대한 향수를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서 ‘뭐하러 그렇게까지 … ’ 만년필을 써야하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연필이나 볼펜 등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도구가 주변에 널려 있고 힘들이지 않고도 많은 글을 보기 좋게 편집해 주는 어플들도 있다. 심지어 AI는 주제만 주면 천연덕스럽게 글도 써준다는 세상이다.
사실 푸른 빛의 용은 인터넷 연하장에 즐비하게 깔려 있다. 클릭 한번이면 손쉽게 다운받아 힘들이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라도 전할 수 있다. 그 뿐인가. 새해인사는 물론 평상시에도 대중화 된 글귀를 내 마음 대신 간편히 전할 수 있다. 다만 상대방의 독특한 개성이 고려되지 않을 뿐이다. 나 역시 그렇게 부담 없는 많은 글귀들을 전해 주고 수시로 받기도 하는 요즘 사람이다. 그런데도 굳이 신경을 쓰면서 내게 맞는 잉크색을 만들고, 펜촉을 세척하는 등 시간과 돈을 들이는 어리석은 일을 자처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생각해 보면 지금껏 받은 그 어느 글귀에서도 깊은 공감을 느끼지 못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가슴에 머무르지 못한 많은 글귀들이 어느 샌가 일상으로 바뀌어 평범 속에 묻혀버리는 허전함이 매년 매회 반복되고 있었다.
그래서 일까… 연하장에서 꿈틀대는 푸른 용트림을 보자 가슴 속 숨어있던 감정들이 살아나면서 잊었던 만년필의 잉크 냄새가 생각난 것이다. 무언가를 쓰고 마음을 글로 표현하고 전한다는 것은 게으르지 않게 산다는 것일 게다. 스스로 생각하고 그 생각을 적절하게 그려내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디지털 세상에서 얼핏 보면 미련하기 짝이 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도 한다. 하지만 비효율적이고 비 경제적인 그 미련의 우직함에는 분명 무엇인가가 있다.
조금은 미련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푸른 잉크의 펜촉이 만들어 내는 종이의 사각거림이 느껴졌다. 그것은 따뜻하고 차분히 내려 앉아 진한 흙내음을 맡는 평화로움 이었다. 이 고요한 여유를 만년필에 담은 푸른 글귀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는 소망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