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지만 사람을 사로잡을 수 있는 힘, 그것은 ‘말’이다. 말을 하는 데는 돈 한 푼 들어가지 않으나 그 힘은 실로 크다. 비용이 들지 않는 말을 통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 그래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을 수 있다는 소리가 나왔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 신사가 뉴욕의 공원에서 노숙자를 만났다. 그 노숙자는 ‘나는 맹인입니다(I am blind)’라고 적힌 푯말을 목에 걸고 구걸하고 있었다. 하지만 행인들은 그냥 지나칠 뿐 적선을 하지 않았다. 신사는 노숙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노숙자의 목에 걸린 글을 고쳐 적었다.
그 다음부터는 갑자기 적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 신사는 푯말을 이렇게 바꿨던 것이다. “바야흐로 봄은 오고 있으나 나는 볼 수가 없습니다(Spring is coming soon. But I can not see it)”. 그 신사는 바로 프랑스의 시인 앙드레 볼톤이었다.
2000년 미국 대선 공약에서 조지 부시 대통령은 ‘세금 감면’이라는 말을 버리고 ‘세금구제’라는 용어를 선택했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것은 단지 우연이었을까? 언어학자들은 그 힘을 언어의 프레임으로 설명 한다. 프레임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을 의미하는데 가장 강력한 도구는 바로 언어다. 같은 내용의 말도 때와 장소 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적인 색깔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황희 정승이 혈기왕성하던 젊은 시절에 들길을 가다 나무 그늘에서 잠시 쉬고 있는데, 한 농부가 소 두 마리로 밭을 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마리는 누런 소고 다른 한 마리는 검은 소였다.
문득 궁금증이 생긴 황희는 농부에게 “황소와 검은 소 중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라고 큰 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농부가 쟁기를 세우고 밭에서 나오더니 황희를 멀리 떨어진 곳까지 데리고 가서는 아주 작은 귓속말로 “누런 소가 훨씬 일을 잘합니다. 검은 소는 일도 못하면서 꾀를 부립니다”라고 말했다.
황희는 이상해서 “왜 이 먼 곳까지 와서 귓속말을 하십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농부는 “아무리 짐승이라도 저에 대한 이야기는 알아듣습니다. 저 잘못한다는 말을 듣고 좋아할 짐승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답했다. 같은 내용의 말도 때와 장소 또는 말을 하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정적인 색깔에 따라 다양한 효과를 나타내게 된다. 마음을 움직이면 상대방의 호감을 살 수 있다.
말솜씨는 단순히 입에서 나오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말은 마음을 담아낸다. 말은 마음의 소리다. 내가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 품격이 드러난다. 나만의 체취, 내가 지닌 고유한 인간의 향은 내가 구사하는 말에서 뿜어져 나온다. 지금 우리는 ‘말의 힘’이 세상을 지배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온당한 말 한마디가 천 냥 빚만 갚는 게 아니라 사람의 인생을, 나아가 조직과 공동체의 명운을 바꿔놓기도 한다.
말하기가 개인의 경쟁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 지도 오래다. 말 잘하는 사람을 매력 있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풍토는 갈수록 확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날카로운 혀를 빼 들어 칼처럼 휘두르는 사람은 넘쳐나고, 자극적인 이야기를 폭포수처럼 쏟아내며 좌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능변가가 홍수처럼 범람한다.
중국에 처세 잘하기로 소문난 풍도(馮道)라는 재상이 있었다. 그는 당나라 말기에 태어나 당나라가 멸망한 이후 후당 후량 후주 후진 후한 등 53년 동안 흥망한 다섯 왕조에서 10명의 임금을 섬길 정도로 처세의 달인이었다. 그가 남긴 설시(舌詩)는 오늘날에도 처세훈으로 삼아봄직하다.
구시화지문(口是禍之門) 설시참신도(舌是斬身刀 ) 폐구심장설(閉口深藏舌) 안신처처뢰(安身處處牢)…입은 재앙의 문이요 혀는 몸을 자르는 칼이다. 입을 닫고 혀를 깊이 감추면 처하는 곳마다 몸이 편하다는 내용이다. 이 시에서 입을 조심하라는 구화지문(口禍之門)이라는 고사성어가 유래했다.
하지만 살다보면 말을 해놓고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 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스스로의 말은 누군가에게 꽃이 될 수도 있으나, 반대로 창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 말로 꽃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문득 이해인 수녀의 ‘말을 위한 기도’라는 시가 떠오른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수없이 뿌려 놓은 말의 씨들이/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모른다고 생각하면/왠지 두렵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제가 할 말은/참 많은 것도 같고/적은 것도 같고/그러나 말이 없이는/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슬기로운 말의 주인이 되기는/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허락하신 주여/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도(道)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