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났다 헤어지고, 헤어졌다 또 만나고…길 위에서 만난 사람 저마다 ‘사람향기’
# 8일째
어느 알베르게건 들어갈 때는 신을 벗는다. 온종일 걸은 신발로 침실까지 갈 수 없는 까닭이다.
당연히 나올 때는 신발을 신는 것으로 시작한다. 새벽, 로비에 모여 신발을 신는다. 내 동작이 빨랐나 보다. 제일 먼저 신었다. 호기롭게 인사한다. “Brother and sisters, 뷔엔 까미노!” 여기저기에서 화답한다. “뷔엔 까미노!” “올라!” “올리비아!”
길은 어둡다. 산길로 접어드니 표시도 못 찾겠다. 그런데 저기! 불빛이 보인다. 나보다 앞선 순례자의 모자, 거기에 붙은 작은 랜턴의 빛이다. 저 작은 빛 하나가 등대와 같이 큰 의지가 된다. 그 빛을 따라 한참을 걸었다.
순례자들을 위해 이런 작은 돌을 모아 가야할 방향을 표시했다.
동이 틀 무렵 나제라 (Najera)에 도착했다. 큰 도시다.
마리아 대성당을 지날 때 호주에서 온 순례자 부자를 만났다. 아버지 데니스는 75세. 아들 매튜는 51세. 아버지는 오래 전에 은퇴했고 아들은 사진작가란다. 이번까지 카미노가 4번째다.
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아버지의 대답. “그것을 알려고 걷는 중이다.” 아들의 대답. “아버지가 걸으니까 나도 걷는다.”
다시 걷는다. 방향이 서쪽이라 태양은 등 뒤다. 늘 등 뒤를 따뜻하게 한다. 그림자가 앞서간다. 앞서가는 내 그림자를 본다. 벙거지 하나 쓰고 등에는 배낭. 배낭에는 조가비가 달려 있고, 그 조가비 덜렁덜렁하면서 걷고 있다.
이런 곳에서 목을 축이고 쉬기도 한다.
많은 사람을 스쳐간다. 이 지방에 사는 사람들. 스칠 때마다 “올라!” “뷔엔 까미노!” 손을 흔들면서 격려해준다. 차가 지나가면서 경적을 울려준다. 먼지길에서 커다란 트랙터를 몰고 가다가, 순례자가 지나가면 서서히 몬다. 아예 서주는 농부도 있다.
이렇게 이 길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순례자도 만나고, 농부도 만난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사람만의 향기가 있다. 맑은 영혼의 사람도 있고, 하늘처럼 맑은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과의 만남이 얼마나 좋은지.
이 생각 저 생각에 오늘 묶을 알베르게에 도착했다. 운영자가 엄청 친절하다. 문 앞에서부터 금방 짜낸 오렌지 주스를 내주고 침상까지 배낭을 들어다 준다. 고개를 숙이고 일을 하다가 부르면 고개를 드는데, 얼굴에 반달보다 더 큰 웃음을 짓는다. 타고난 것인지, 훈련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참으로 아름답다.
그렇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운다. 유치원에서 배운 작은 에티켓, 그 사소한 공중도덕 하나만 제대로 지킨다면, 세상은 얼마나 좋아지는지 모른다. 언제나 작은 미소 하나만이라도 지을 줄 안다면 세상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워지는지! 다시금 느낀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 산티아고 가는 길! 이 길은 진정 아름다운 길이다!
오늘은 저 마을 알베르게에서 묵는다.
# 9일째
오늘도 길을 나선다. 조가비 덜렁거리는 소리 벗 삼아 길을 나선다. 시작은 좋았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것을 느꼈다.
이정표를 찾지 못했다. 앞서가는 사람도 없다. 앱이 기능을 하지 않는다. 속수무책이다. 그래도 걸었다. 아까까지 맞았으니까 지금도 맞으려니, 그냥 걸었다. 앱이 기능을 한다. 다시 보았다. 틀렸다. 반대 방향을 가고 있었다. 무려 45분을 거꾸로 간 것이다. 방향을 돌렸다. 돌아오는 시간은 좀 더 짧은 법! 30분 만에 길을 찾았다.
큰 교훈이다. 여태 이렇게 살지 않았는지. 나는 옳다 하고 갔지만 실은 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지 않았는지. 그래도 빨리 깨닫고 돌아왔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했는가? 아찔하기만 하다.
순례길의 여러 표지판들. 의미 심장한 문구도 적혀 있고 방향도 알려준다.
다시 조가비 덜렁거리는 소리 벗 삼아 길을 간다.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태양은 그 위용을 드러낸다. 살 것 같다. 저 불어오는 바람에 존재를 느끼고, 떠오르는 태양에 내가 살아있음을 본다. 계절이 바뀌고 있다. 바뀌는 계절 속에서 홀로 걷는다는 것. 아무리 생각해도 행복하다.
길은 계속 이어진다. 산타 도밍고까지 왔다. 조그마한 카페에서 휴식을 취한다. 순례자들이 모여든다. 며칠 전에 만났던 순례자들. 스웨덴에서 온 모니카 요하네스 모자, 브라질에서 왔다는 이름 잊은 오누이, 뉴욕에서 온 마크, 그 밖에 또…
어제, 그제, 혹 며칠 전에, 알베르게에서, 길목 카페에서, 휴게소에서 만났던 사람들. 어제 헤어졌어도 목적지가 같기에 오늘, 다시 만난다. 인생의 축소판이다. 산티아고 가는 이 길은!
또 흩어져 제 갈 길을 간다. 헤어져도 섭섭지 않은 것은 내일 다시 만나기 때문이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이것이 인생인지 인생은 늘 이랬다. <계속〉
글·사진/ 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 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