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의 죽음을 앞둔 최후의 14일을 묘사한 올리버 히르슈비겔 감독의 영화 〈다운폴〉에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나온다. 소련군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가운데 베를린 중심가의 방어 임무를 맡은 빌헬름 몽케 소장이 총통 벙커를 찾아왔다. 그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 휘하의 국민돌격대가 변변한 무기도 없이 개죽음을 당하고 있으니 중단시켜달라고 건의했다. 그러나 괴벨스의 반응은 냉랭했다.“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소. 다시 말하지만 난 그들을 동정하지 않아요! 이것은 그들이 직접 선택한 운명이니까요. 당신에겐 매우 충격적인 이야기겠지만, 당신 스스로 멍청해지려 하지 마시오. 우리는 한 번도 그들에게 강요한 적이 없소. 우리는 한 번도 우리가 무엇을 할지 숨기지 않았소. 그들은 스스로 우리에게 정권을 넘겨줬지. 그리고 그들은 지금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거요.”
도대체 이런 미치광이 집단 나치는 어떻게 정권을 잡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무장 혁명이나 쿠데타로 나라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민주적 선거라는 합법적 절차를 통해 당당하게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 괴멜스의 말은 실로 뻔뻔하고 무책임하지만 그렇다고 거짓말도 아니다. 독일 국민은 총칼의 위협이 아니라 스스로 나치당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이 인간들이 그 정도까지 미친 놈들인 줄은 몰랐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더욱 불가사의한 사실은 따로 있다. 바로 히틀러라는 인물이다. 히틀러는 대중의 열렬한 추앙을 받을 만한 어떠한 요건도 가지지 못한 인물이었다. 처칠 같은 명문가 출신도 아니었고 나폴레옹같은 위대한 전쟁 영웅도 아니었으며 스탈린처럼 권력 투쟁의 승자도 아니었고 카스트로나 티토, 마오쩌둥같은 혁명 리더도 아니었다.
오직 권력에 눈이 먼 기성 정치인들은 혜성처럼 나타나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히틀러를 경쟁적으로 끌어들였다. 이들은 히틀러를 벼락출세한 정치 뜨내기이자 잠시 쓰고 버리기 좋은 말로만 여겼지만 그것은 엄청난 오판이었다. 히틀러는 훨씬 야심 만만한 인물이었고 한번 기회를 잡자 경쟁자들을 모조리 제거하여 단숨에 권력을 장악했다. 명문 엘리트 출신으로서 꽃길만 걸어온 기성 정치인들은 행동력과 추진력,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히틀러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들에게 히틀러는 그동안의 모든 상식을 뛰어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기성 정치인들의 탐욕과 구태의연한 정쟁에 진절머리가 나 있던 독일 국민들 역시 말로만 떠드는 것이 아닌 행동으로 뭔가를 보여주는 것 같은 히틀러의 혀에 가스라이팅되어 열광적으로 지지했다. 나중에 보니 죄다 거짓말에 사기였지만 말이다. 결국 어설픈 민주주의가 괴물을 탄생시킨 셈이었다.
시쳇말로 ‘잉여인간’이었던 히틀러가 정치에 나서게 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절망과 좌절감 덕분이었다. 울분이 가득했던 히틀러는 누구든지 붙잡고 떠들어대곤 했는데 그것이 군 고위장교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보통의 극우파나 왕당파 인물들처럼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내려가는 것이 아니라 청중들에게 온갖 제스쳐로 호소하면서 현장 반응에 따라 자유자재로 선동했다. 히틀러는 자신을 대중과 하나로 연결된 메시아처럼 포장했다. 그는 독일민족의 결속과 외국의 위협으로부터의 조국의 해방, 국민군의 창설, 사회보장제도의 확충 등 ‘고귀한 목표’를 제시하여 청중을 사로잡았다. 사회주의 대두에 위협을 느낀 중산층과 사회주의 운동에서 소외된 노동자들, 울분에 찬 실업자들, 독일제국의 부활을 꿈꾸는 왕당파, 반동적인 군부, 자본가계급은 히틀러의 연설에 환호성을 올렸다.
드디어 히틀러의 나치당은 총선에서 승리했다. 총리가 된 히틀러는 이내 ‘비상사태법’이라는 무기를 꺼내들었다. 반대편 세력들을 가차 없이 체포하고 고문, 투옥했고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나치당이 아닌 다른 정당은 모두 폐쇄했으며 모든 노조를 금지했다. 히틀러는 집권한 지 반년이 안 되어 민주주의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를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독일 국민이었다.
‘개와 늑대의 시간’이라는 프랑스어 표현이 있다. 해 저물녘 어스름한 때 다가오는 실루엣이 내가 기르는 개인지, 나를 해치러 오는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시간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선거의 특성이 그렇다. ‘선거는 나보다 나은 사람을 뽑는 선택’이다. 이는 시민 누구나 동등하다는 전제에서 추첨으로 공직자를 뽑던 오래전 민주주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노예가 지배자를 고르는 방식’이라고도 볼 수 있다. 선거 자체가 곧 민주주의는 아니라는 얘기다. 선택받은 사람이 진정 가장 나은 자였는지는 선택이 끝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이번 총선도 그럴 것이다. 기대보다 걱정이 앞선다. 후보자 면면을 보면 범법·종북·저질 후보가 너무 많다.
누가 선거는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말했는가. 꽃을 피우기에는 지나치게 진통이 격렬하고, 향기가 아니라 악취가 만연하기도 한다. 아름다운 꽃은 커녕 괴물을 탄생시키기도 했던 수많은 역사적 사례들을 떠올린다면 선거 예찬은 감상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선거의 풍경은 정원이 아니라 전쟁터로 비유해야 적절해 보인다. 프랑스의 정치철학자 장 자크 루소는 이미 영국의 대의민주주의를 두고 “국민은 투표 할 때만 자유롭다. 의원이 선출되면 국민은 다시 노예로 전락한다”고 비판했다. 투표가 끝나고 난 뒤에 평범한 시민들이 대표자들을 통제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 개와 늑대들의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유권자들의 선택이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