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에서 왔다는 11개월 아기 케일럽
내 손자와 같은 이름 반가워 축복기도
# 22일째
카미노를 준비할 때 앱을 4개 깔았다. 그중에서 한 개가 고도를 나타내는 앱이다. 언제 고도를 계산하면서 살았겠느냐만 여기서는 이것이 중요하다. 일기예보를 체크하고, 고도를 잘 계산해서 일정을 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생 많이 한다. 오늘은 몰리나세카(Molinaseca)까지 25km를 걷는 날. 가는 길에 1500m 고지를 넘어야 한다.
길을 나섰다. 어제는 앞에 순례자의 불빛이 보였는데 오늘은 없다. 뒤를 돌아보아도 없다. 홀로 걷는다. 두 시간 반을 걸었다. 해가 떠오르고 이내 등이 따끔거린다.
흙길을 걷다가 이젠 차도를 걷는다. 219.3km 남았다.
이 시간이 되면 아침 식사를 한다. 잊지 않고 주문하는 것이 오렌지 주스. 큼지막한 톱니바퀴가 몇 개가 있는 짤순이에 주먹보다 더 큰 오렌지 3개를 넣으면 한 잔이 나온다. 엑기스! 오렌지 주스와 더불어 삶은 달걀 2개, 바나나 2개, 크로샹 하나,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한다.
오르막길이 길어진다. 이 길 끝은1500m 고지가 된다. 가는 길에 철 십자가가 있다. 카미노의 랜드마크 중의 하나. 철 십자가를 지나 드디어 1500m 고지에 올랐다. 내려다본다. 넓은 평원이 눈앞에 가득하다.
스페인은 천혜의 땅이다. 비옥한 대지, 풍성한 물, 타오르는 태양. 올리브와 포도가 지천이다. 포도가 지천이니 어디든지 와이너리가 있다. 순례자 중에는 성당을 따라 순례하지 않고, 와이너리를 따라 순례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그래서일까? 이곳에서는 물과 와인은 동격이다. 레스토랑에 앉으면 제일 먼저 묻는 말. “물줄까? 와인 줄까?” 그래도 물은 물이고 와인은 와인이다. 물은 큰 잔에 주고 와인은 작은 잔에 준다.
이런 터널도 지난다.
점심시간이다. 역시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바에 들어간다. 누들과 빵이다. 파스타나 스파게티를 즐겨 먹는다. 점심을 마치고 계속 걷는다. 내리막길이다. 해발 500m가 될 때까지 내려가야 한다. 아슬아슬하다. 자전거도 무용지물. 아예 저 멀리 돌아간다.
드디어 알베르게. 저녁은 여기에서 해결한다. 스페인의 일반 레스토랑은 오후 8:30에 오픈 한다. 그러나 알베르게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은 오후 6:30에 오픈하고, 순례자 식단이 있다.
순례자 식단은 여느 레스토랑과 같다. 우선 전식을 준다. 주로 채소. 메인 메뉴는 소고기, 닭고기, 돼지고기, 그리고 생선 중 택일. 양고기를 기대했는데, 나오지 않는다. 양고기가 소고기보다 비싸단다. 메인 메뉴가 끝나면 디저트를 준다. 요구르트, 아이스크림, 과일 중 택일.
22일째를 마쳤다. 익을 데 익었고 묵을 데 묵었다. 그동안 매일 10kg 이상의 배낭을 메고 20-30km의 길을 걸었다. 그냥 걸었을 뿐인데, 이 시간이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니 신기하지 않은가?
1500 고지에서 만난 철 십자가. 카미노 순례길의 랜드마크다
# 23일째
길을 나선다. 비가 떨어진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비가 온다 하더니만, 여지없이 비가 내린다. 그래도 괜찮다. 가장 어려운 1500고지를 어제 넘었기에. 평탄한 길을 걷는다. 비는 계속되고 길은 수려하다. 비 때문에 운해가 끼니 운치를 더한다.
점심때가 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하는데 평소에는 보지 못했던 사인이 보인다. “이 지방 특산물이 있어요.”
얼른 들어갔다. 추로스(Curros)를 준다. 빠에아와 함께 스페인의 대표 음식. 우리로 말하면 꽈배기와 같은 것이다. 커피에 4개를 얹어준다. 바싹바싹, 맛있게 먹었다.
커피 한 잔 곁들인 스페인 명물 추로스(Curros).
또 하나의 기연이다. 엄마 아빠가 아기를 건사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는데 행여 비 한 방울이라도 맞을세라, 애지중지 아기를 돌본다. 아기 이름을 물었다. “케일럽!” 케일럽이라고? 내 손자 이름과 똑같다.
호주에서 왔다. 생장에서 여기까지 42일 걸렸단다. 케일럽은 11개월. 이 길에서 만난 사람 중 가장 어린아이다. 11개월 아들을 안고 42일에 걸쳐 여기까지 온 것이다.
어떻게 11개월짜리 아이를 데리고 이 어려운 길을 걷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이다. “언젠가는 걸어야 할 길이기에!”
케일럽 가족. 생후 11개월이라는 이 아기는 이번 순례길에 만난 사람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케일럽을 축복했다. 온 마음을 모아 진심으로 축복했다. “케일럽, May God bless you, God bless you!” 자녀를 축복하면 부모가 더 좋은 것. 활짝 웃으며 몇 번이나 땡큐, 땡큐!
오늘도 좋은 날. 비가 와서 좋은 날, 추로스를 먹어서 좋은 날, 축복해서 좋은 날. 〈계속〉
글·사진= 송희섭 애틀랜타 시온한인연합감리교회은퇴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