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문호 괴테는 80세가 넘어서 피를 토하는 큰 병에 걸렸다. 모든 사람이 죽음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위독했지만, 당시 대작 〈파우스트〉를 마무리하고 있던 그는 이렇게 외쳤다. “세상에서 나만 할 수 있는 어떤 일이 아직 남아 있다면, 이렇게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죽음아 물러가라”라고. 강력한 의지로 병을 이겨낸 그는 무사히 〈파우스트〉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의 삶은 평생 활력이 넘쳤다. 많은 사람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그 자신도 만족한 삶을 살았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당당한 풍채였고, 한 마디로 압도적인 인상이었다. 게다가 무슨 일이든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하는 모습이 마치 청년과도 같았다. 괴테의 풍모가 느껴지는가? 세상에 수많은 위대한 작품과 사랑을 남긴 그의 삶은 누구보다 우아했고 기품이 넘쳤다.
젊었을 때는 많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멋지다. 하지만 멋있게 나이 드는 건 어렵다. 타고난 것들은 시간과 함께 퇴색되며 내가 마음에 심고 가꾼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보다는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무언가가 ‘아우라’를 만든다. ‘아우라’가 있는 사람은 스스로 빛을 발한다. 눈빛이나 작은 행동만으로도 다른 사람을 감화시키는 힘이 있다. 품격은 우리가 지닌 또 다른 언어다. 품격은 겉모습을 꾸민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화장품 병에 담을 수도 없는 내면의 빛이다. 그것이 카리스마와 품격을 만든다. 한 사람의 정신과 마음 상태는 그가 어떤 행동이나 말을 할 때 가감 없이 드러난다.
언어의 무게를 가늠할 줄 알아 함부로 말을 내뱉지 않고 필요한 만큼 절제할 줄 알며, 올바른 일을 위해서라면 약간의 수고로움과 불편을 기꺼이 감수하는 사람은 품위가 있으며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아우라를 내뿜는다. 자신이 좀 불편하더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인생의 후반은 멋지게 살고 싶다고 늘 생각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좀 막연한 느낌이었는데 파울로 코엘료가 쓴 글을 읽다가 ‘기품’이란 단어를 발견했다. 바로 이것이다. 파울로 코엘료는 기품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인간이란 존재는 무릇 행동과 자세에 기품이 있어야 한다. 기품이란 훌륭한 취향, 우아함, 균형과 조화의 동의어다.”
행동과 자세에 기품이 있으려면 훌륭한 취향을 가져야 하고, 우아하고 삶이 균형과 조화를 이뤄야 한다. 〈중용〉에서는 ‘군자는 보지 않는 곳에서 삼가고, 들리지 않는 곳에서 스스로 두려워한다‘라고 했다. 이런 경지를 신독(愼獨)이라 한다. 숨겨져 있는 것보다 더 잘 보이는 것은 없고, 아주 작은 것보다 더 잘 드러나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군자는 홀로 있을 때 스스로 삼간다(故君子愼其獨也)에서 나온 단어이다. 혼자 있을 때 스스로 삼가는 것은 수신 즉, 개인 수양의 최고단계이다. 이런 경지라면 기품은 저절로 우러날 것이다. 나를 돌아본다. 걸음걸이부터 몸가짐, 마음가짐, 생활태도 등 모두에서 고쳐야 할 부분이 많다.
품격은 모두의 바람이지만 결코 쉽지 않은 길임을 왜 모르랴. 그러나 남에게 크게 비난받지 않는 삶은 마음먹기에 따라 그리 어렵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가 이웃에게 믿음과 존경을 받는다면 더없이 훌륭한 인생 성적표이겠지만, 비난과 외면을 받지 않는 삶도 그런대로 무난한 인생 성적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많은 사람들이 기품 있는 사람이 되길 원하 듯, 나 또한 그렇다. 젊은이야 본분만 하면 된다지만 노인은 거기에 나잇값까지 해야 하는 부담이 있다. 짐승이야 이빨로 나잇값을 한다지만, 사람은 나이가 들면 오히려 이빨이 빠져나가니 나잇값 하기가 어렵다. 잇몸으로 이빨을 대신한다고도 하지만 세상사가 단팥죽처럼 물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물리적으로는 임플란트로 이빨을 대신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나잇값은 잇몸이 아니라 인품, 인격으로 할 수밖에 없다. 옛날에는 추상같은 위엄과 권위는노인의 허연 백발과 수염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추상같은 백발은 염색되었고, 수염도 말끔히 면도되었으니 옛날 노인의 위엄과 권위는 다시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렇다고 염색을 지우고 수염을 다시 길러서 해결될 리도 없고, 더구나 노인의 품격을 포기할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나는 이런 노인이 되고 싶다. 넉넉하고 윤택하지 않아도 삶이 그윽하고 만족스러워 무엇을 먹어도 무엇을 입어도 어디에 살아도 즐겁게 모든 사람과 모든 것을 고마워하며 살 수 있는 분. 언제 삶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가끔 하면서 자신의 주변을 흐트러지지 않게 정리하시는 분. 자기를 애써 돋보이려고 하는 것은 실은 자기 확신이 없고 속이 텅 빈 모습이라는 사실도 보고, 늙음을 초조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추하고 딱한 모습인가 하는 것도 보시는 분. 나는 이러한 노인을 만나면 그런 노인이 되고 싶다.
은발의 노인이 벤치에 앉아있다.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다. 중후한 기품이 풍긴다. 영화의 한 장면이다. 멋스럽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단순히 늙어가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나이가 들어간다는 것은 생에 대해 더욱 완숙해지고, 더욱 풍부해지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진실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나이 들고 늙는 그 자체가 아니라, 정신의 완숙이 없이 육체만 늙어버린 상태이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진실로 싫어하고 경계해야 할 것은 외형의 주름살이나 구부러진 허리가 아니라, 아직도 다스리지 못한 욕망을 덕지덕지 내보이며 생리적 연치만 내세워 심술을 부리는 그런 노년의 상태일 것이다. 집안에도 그렇고, 나라에도 그렇고, 진정한 어른이 건재하고 사랑과 활기에 찬 노인이 계시는 곳은 눈부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