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다음으로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책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읽은 책’으로 유명한 마가렛 미첼의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조지아주와 애틀랜타를 배경으로 한다. 출간과 동시에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1937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하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할리우드의 고전으로 남았다.
1957년 국내에서 처음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 학교에서는 ‘문화영화’라 하여 고등학생들에게 단체관람을 시켜주었다. 서울 국도극장에서 본 영화의 명장면과 명대사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할리우드의 고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첼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다. 이 영화는 남부 조지아 주 타라 농장의 딸 스칼렛(비비안 리)이 남북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모든 것을 잃었지만,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스칼렛 오하라(비비안 리 )의 당찬 모습과 그녀를 사랑하는 터프하고 자신만만한 레트 버틀러(클라크 게이블)의 이야기다. 이 두 사람의 매력이 영화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첼의 원작 소설을 빅터 플레밍 감독이 연출하여 1939년에 데이비드 셀즈닉이 제작한 이 영화는 할리우드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한 대작 영화로 평가된다. 특히 영국 배우 비비언 리는 스칼렛 오하라의 이미지를 거의 완벽하게 구현해서 그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오만하고 제멋대로이며 콧대 높은 주인공 스칼렛 오하라는 대지주의 딸이다. 그녀는 이웃 남자 애슐리를 좋아하지만, 애슐리가 자기 사촌 멜라니와 결혼하려 하자 복수심으로 애슐리 동생의 약혼자이자 멜라니의 오빠인 찰스와 결혼한다. 찰스가 전쟁에 나가 전사하고 북군이 몰려오자 스칼렛은 극심한 가난과 고초를 겪게 된다.
온갖 궂은 일을 전전하던 그녀는 동생의 약혼자인 프랭크와 재혼해 애틀란타에서 사업을 시작해 그 사업체 중 하나를 애슐리에게 맡긴다. 프랭크 역시 결투 중에 죽고, 스칼렛은 다시 홀몸이 된다. 이제 27세가 된 스칼렛은 자신과 성격이 비슷한 레트 버틀러와 결혼한다.
그러나 애슐리를 잊지 못하는 그녀를 보고 레트는 결국 그녀의 곁을 떠난다. 사촌 멜라니가 죽은 후에도 애슐리가 자기를 거부하자 스칼렛은 비로소 자신이 정말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레트였다는 사실을 깨닫지만 이제 모든 것은 다 끝났다. 온갖 풍상 속에서 더욱 성숙하고 강인해진 스칼렛은 고향 땅 타라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하며 중얼거린다.
“나는 레트를 되찾을 수 있어. 반드시 되찾고 말거야! 일단 내가 마음에 둔 남자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남자는 없지 않았는가. 그래, 모든 것 내일 타라에서 생각하자. 그러면 견뎌 낼 수 있을 거야, 내일 그 사람을 되찾을 수 있는 방도를 생각해 봐야지, 내일은 또 내일의 해 가 뜰 거야.”
삶의 양식은 바뀌어도 땅은 영원하다. 전쟁으로 인해 옛 삶의 방식은 송두리째 사라지고 말았지만 ,스칼렛은 타라 농장으로 상징되는 땅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집을 잃고 떠돌던 그녀는 다시 옛 농장에 돌아와 전쟁으로 폐허가 된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 이야기는 여주인공이 격변하는 삶의 변화 속에서도 꿋꿋이 땅을 지키면서 삶을 버텨나가는 과정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슷한 주제를 가진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를 연상시킨다.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소설과 영화를 물어보면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주저 없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꼽는다. 요즘의 시대감각으로 보면 어울리지 않고 , 또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는 이 영화가 아직도 미국인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도대체 무엇이 애틀란타의 한 여기자가 쓴 이 소설을 불후의 명작으로 만들었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곧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
“폭풍처럼 몰아쳤던 남북전쟁의 패배로 미국 남부의 부와 영광은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사라졌다. 노예가 없어진 지주들은 경작이 불가능해진 농장을 포기했고, 북부의 뜨내기들이 남부로 몰려들어 헐값에 그 토지를 가로챘다. 불타버린 저택과 몰락한 가문과 갑자기 찾아온 가난 속에서 남부인들은 자신들의 문화와 명예와 자부심이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 것을 망연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뭇 남성들을 죄다 무장 해제시켜 버리는, 그 도도함과 당돌함이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스칼렛 오하라의 케릭터를 비비안 리만큼 완벽하게 소화해낼 수 있는 연기자가 또 있을까 싶다. 그녀는 마치 스칼렛 오하라를 스크린에 담기 위해 태어난 여인 같다.
누구나 내 인생의 영화를 몇 편씩은 갖고 있다. 남들은 그저 그렇다고 말해도 내게는 어딘가 특별한 사연과 추억이 있는 영화 말이다. 영화‘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소년 시절 내 가슴을 뒤흔들었고 그 뒤로도 두고두고 내게 말을 걸고 있다. 거기에는 인생의 많은 요소가 숨겨져 있다.
돌아보면 영화는 달라진 게 없는데, 내가 변했다. 모든 예술은 시대와 사회를 담아낸다. 작품을 통해 당대 사람들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경험해 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영화와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도도하면서도 고혹적인 비비안 리의 당찬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늦은 나이에 이국땅 미국에 이민 와서 여기저기 옮겨 살다 보니 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딴 세상이었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도시 애틀랜타에 지금 내가 살고 있다. 장엄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스칼렛 오하라의 독백을 가만히 되뇌어 본다. “내일은 또 내일의 해가 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