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 관련 모든 증거물 제시 못하면 불리
고의 아니어도 허술한 내부 시스템이 문제”
카운티 소송도 걸려있어 손실 더 커질 수도
조지아주 잭슨카운티 법원은 지난달 26일 SK배터리아메리카(SKBA)가 폐배터리 무단 투기 소송 관련 주요 증거 관리에 실패했다고 판단, 3100만 달러라는 거액의 합의금을 지불하라고 판시했다. 관련기사 : 폐배터리 관리 소홀 SK배터리, 배상금 ‘3100만불’ 물어줬다
한국 대기업 SK온의 현지 법인 SKBA와 재활용업체 ‘메트로 사이트’와의 법정 다툼은 사실 체급이 다른 싸움이었다. 그러나 결과는 예상밖이었다. SKBA 측은 화재 손해배상 1100만 달러, 징벌적 배상 2000만 달러를 합쳐 3100만달러를 물어줬다.
이같은 거액의 합의금 배경에는 ‘디스커버리 제도’가 있다. 원고와 피고 양측이 혐의와 관련된 모든 증거 자료를 공개해야 한다. 자료제출 요구에 불응할 경우 불리한 혐의가 사실인 것으로 간주되거나 법원 기망으로 징벌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한국기업이 이 제도를 알았더라도 내부적으로 관련 문서나 증거물을 보관하는 체계를 갖추지 못한 데 있었다.
잭슨 카운티 법원의 로버트 알렉산더 판사 의견이 담긴 법원 기록. 내부 영상 증거를 보관하지 않은 것에 대한 의혹을 제기하는 대목이다.
대기업조차 증거 중요성을 간과했기에 가혹한 판결을 자초했다고 법률전문가는 지적한다. 대한변호사협회 법제연구원이자 버지니아·메릴랜드·워싱턴D.C 변호사인 김원근씨는 17일 인터뷰를 통해 “디스커버리 제도가 한국에 도입되진 않았지만, 일부 한국 기업들이 해당 절차를 활용하기 위해 국외 소송을 제기할 만큼 잘 알려져 있어 SK가 의도적으로 증거를 은폐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봤다. 실제 SK온은 이날 본지에 법원은 SKBA가 증거를 의도적 인멸했다는 판결을 내리지 않았다고 알려왔다.
문제는 고의성 여부를 떠나 경영 데이터 보존 절차와 체계를 규정하는 내부 정책이 전무한 데 있다. 김 변호사는 “모든 기업활동은 법적 분쟁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하는데 한국기업은 소송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평상시에도 법적 절차에 필요한 내부자료를 상시 보관하도록 직원을 교육하고 적절한 사내 시스템을 갖춰야 하는데 “추후 회사에 불리할 자료는 없앤다”는 잘못된 기업 문화가 오히려 불이익을 부른다는 것이다.
재판장이 독점적 권한을 갖는 한국식 재판과 달리, 미국의 사법제도는 이익 당사자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기 때문에 변호인의 자체 증거 조사와 요구가 가능하다. 한국 기업들이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원고측 변호를 맡은 맥도널드 앤드 코디 로펌 소속 보 헤쳇 조지아주 상원의원은 기자와의 화상 인터뷰에서 “회사가 소송과 관련된 증거를 삭제하는 것은 일반적 관행이 아니고, 변호사 역시 그같은 조언을 했을 리 없다”면서 “회사 내부 증거 삭제는 사법제도에 도전하는 것으로 인식되기 때문에 상대측에 유리한 판결이 내려질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소송 중 증거 은폐는 이로 인해 촉발된 추가 변호비와 포렌식 기술 사용료 등을 모두 물어내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 헤쳇 조지아주 상원의원 겸 맥도널드 앤드 코디 로펌 소속 변호사
이 로펌은 SKBA의 폐배터리 화재 관련, 지방정부인 뱅크스 카운티가 제기한 소송도 맡고 있다. 헤쳇 변호사는 “합의로 재판을 끝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추후 SK 손실이 더 커질 수 있는 이유다. 그는 “단지 한 사업체의 경영 손실뿐 아니라 화재로 인해 발생한 지역 커뮤니티의 환경 악영향 등을 자세히 다룰 수 있는 소송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대해 SK측은 “메트로 사이트 시설 재건과 영업 재개에 필요한 너그러운 합의금을 지급했다”며 “지난달 합의 도달 후에도 원고측이 소송에 대한 주장을 이어가는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반면 원고 로펌 측은 “합의 조건에는 소송 결과가 기밀로 유지되지 않을 것이라는 단서가 명시돼 있다”며 “유해 폐기물을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것에 대한 옳은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라고 맞섰다.
장채원 기자 jang.chaewon@korea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