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성난 백인 남성’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4년만에 재소환했다. 바이든 정부 내내 계속된 고물가 등 경제 문제가 선거의 핵심 프레임으로 부상하면서 백인 노동자 계층이 트럼프로 강하게 결집했다.
트럼프는 이번 선거 기간 내내 “그래서 4년전보다 살기가 좋아졌느냐”는 구호를 반복했다. 물가 상승의 책임을 바이든 대통령과 그의 부통령인 해리스에게 물었고, 해리스는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특히 이번엔 2016년 대선과 달리 흑인과 라틴계 남성의 일부도 트럼프 지지에 가세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더 강력한 ‘미국 우선주의’ 깃발을 내건 트럼프에 대한 남성 노동자들의 기대가 ‘트럼프 2기’를 여는 일등공신이 된 셈이다.
‘먹고 사는 문제’에 “정권 심판”…’생식권’은 후순위
트럼프의 재선을 가능하게 한 핵심 동력은 바이든 정부에 대한 ‘정권 심판론’에 맞춰진 선거 프레임이다. 이날 공개된 CNN의 출구조사에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직무수행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58%로, 지지한다(40%)를 18%포인트 차로 압도했다. 정권심판론의 실체는 바이든 정부 내내 이어진 물가 문제가 핵심에 있었다. 인플레이션이 경제에 미친 영향을 묻는 질문에 22%는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고, 53%는 ‘중간 정도의 어려움’을 호소했다. 두 답변을 합하면 75% 달한다. ‘어려움이 없었다’는 응답은 24%였다.
해리스를 지지자 가운데 98%가 바이든의 정책을 지지한 것과 비교하면 물가 상승에 따른 경제적 고통을 호소한 비중이 75%에 달했다는 것은 민주당 내에서도 상당한 불만이 표출됐을 가능성이 있음을 뜻한다. 실제 응답자의 45%가 경제 상황이 ‘4년 전보다 나빠졌다’고 답했고, ‘나아졌다’는 응답은 24%에 그쳤다.
트럼프는 선거 내내 물가 문제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의 이유를 불법 이민자 문제와 연관지어 바이든 대통령과 해리스 부통령에게 책임을 물었다. 이러한 전략에 대해 바이든은 “재임 기간 일자리가 늘었다”는 논리로 대응했지만 공감을 사지 못한 끝에 후보직에서 낙마했고, 바이든 정부에서 이민 문제를 주도했던 해리스는 불법 이민 문제에 대한 명확한 대응을 하지 못했다.
해리스는 2022년 중간선거 때 위력을 발휘했던 낙태권 등 여성의 생식권 문제로 대응했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 유권자들을 설득하는 데 한계에 부딪혔다. 실제 이날 출구조사에서 가장 중요한 이슈로 부각된 문제는 민주주의(35%), 경제(31%), 낙태(21%), 이민(11%) 순으로 나타났다. 특히 트럼프 지지자들은 51%가 경제, 20%가 이민문제를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블루월’ 무너뜨린 성난 ‘남성 군대’
트럼프의 전략에 가장 강하게 동조한 계층은 가정 경제를 이끄는 남성 유권자였다. 특히 백인 남성들은 트럼프가 ‘블루월(blue wall)’로 불리는 전통적 민주당 강세 지역인 펜실베이니아·미시간·위스콘신 등 러스트벨트(rust belt·쇠락한 공업지대)의 경합주 3곳을 모두 석권하는 핵심 지지층을 담당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펜실베이니아 유세에 자신을 지지한 철강노조원들과 함께 연단에 올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이들 3곳은 민주당의 강세지역이지만 2016년 대선 때 백인 남성들의 압도적 지지 속에 이들 3개 주 모두 트럼프의 손을 들어줬지만, 2020년 대선에선 다시 민주당 후보인 조 바이든을 선택했었다.
트럼프 입장에선 이런 ‘적진’을 탈환하면서 당초 박빙의 승부가 예상됐던 대선판을 완승으로 바꿨다. 트럼프의 역전엔 이번에도 백인 남성 노동자의 표심이 결정적이었다. CNN의 전국 출구조사에서 백인 남성들의 59%가 트럼프를 지지하며, 39% 그친 해리스를 압도했다. 러스트벨트 3곳에서 트럼프가 얻은 백인남성의 지지율은 58~59%로 전국 기준 지지율과 차이가 나지 않았다.
흑인·히스패닉 남성은 가세…백인 여성 결집 한계
트럼프는 북부 경합주에서 백인뿐 아니라 흑인과 라틴계 남성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전국 기준 흑인 유권자들은 86% 대 12%로 해리스를 지지했는데, 이는 4년 전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흑인들의 지지로 당선됐던 조 바이든 대통령 때와는 차이가 난다.
특히 흑인 남성들이 20%, 라틴계 남성의 53%가 트럼프를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각각 7%와 37%에 그친 흑인 여성과 라틴계 여성 지지율과는 유의미한 격차를 보였다.
반면 이번 선거의 핵심 이슈로 낙태 등 여성의 생식권을 내세우며 여성 표심의 결집을 시도했던 해리스의 전략은 고물가와 고용 불안에 내몰린 러스트벨트 내 백인 여성들의 동의를 완전하게 이끌어내는 데는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전국 기준 여성 유권자들은 54% 대 44%로 해리스에게 보다 높은 지지를 보냈다. 그러나 백인 여성들은 47% 대 52%로 오히려 트럼프를 더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해리스에게 92%의 몰표를 준 흑인 여성들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다.
흑인 남성, ‘최초 흑인 여성 대통령’ 막아섰다
해리스가 확장을 시도했던 남부 선벨트 일대에서도 적지 않은 흑인·히스패닉 남성들은 해리스 지지에서 이탈해 트럼프를 택했다. 16명의 선거인단이 걸려 펜실베이니아 못지 않은 핵심 전장으로 부상했던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의 흑인 남성들은 각각 16%와 20%가 트럼프에게 투표했다. 네바다에선 이들의 트럼프 지지율이 25%에 달했다. 이로 인해 이들 3곳에서 얻은 해리스의 흑인 지지율은 각각 87%·86%·81%를 기록했고, 애리조나에선 75%까지 떨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지난 8월 애리조나에 설치된 멕시코와의 국경에서 연설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결과적으로 흑인 인구 비율이 미국 전체에서 가장 높은 조지아와 노스캐롤라이나에 거주하는 흑인 남성들이 최초의 ‘흑인 여성 대통령’을 노렸던 해리스를 낙선시키는데 일정 역할을 하게 된 셈이 됐다.
트럼프는 남부 격전지에서 불법 이민 문제를 적극적으로 제기하며 “불법 이민자들이 흑인과 히스패닉 시민권자들의 일자리를 뺏고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는데, 히스패닉 남성들도 트럼프의 주장에 큰 공감대를 보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국 히스패닉 남성들의 트럼프 지지율은 53%로 오히려 해리스를 앞섰고, 특히 노스캐롤라이나와 네바다에선 해스패닉 남성들의 트럼프 지지율이 60%와 56%를 기록했다.
워싱턴=강태화 특파원 thkang@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