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책으로 인생배우기 (34)
‘어느 날, 피렌체와 빌바오 근처의 한 마을에 유리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Child of Glass〉그림책을 탄생시킨 베아트리체 알레마냐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태어나 지금은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그림책 작가이다. 도서관에서 그림책을 고르다 보면 자주 보게 되는 도시, 이탈리아 볼로냐는 ‘볼로냐국제아동도서전’이 주관, 선정하는 ‘라가치상’으로 유명하다. 이 상은 그림책 분야의 노벨상으로 불린다. 해마다 한국 작가들의 창의적이고 예술성 높은 작품들이 선정되고 있으니 관심 가져보면 좋겠다.
어느 날, 한 마을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투명한 유리 아이가 태어났다. 아이의 이름은 지젤이다. 몸 전체가 유리 진열장처럼 훤히 들여다보이지만, 크고 사랑스러운 눈과 섬세한 손가락, 맑고 빛나는 모습에 사람들은 감탄한다. 그런데 문제는 지젤의 생각까지 다 보인다는 것이다. 어릴 때는 보기만 해도 알게 되는 지젤의 걱정과 두려움이기에 쉽게 위로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젤이 자라면서 투명한 이마 뒤로 아름다운 생각과 함께 어둡고 끔찍한 생각들이 드러났고, 예민해진 지젤이 슬픔이나 분노를 느낄 때면 손톱이나 다리에 작은 금이 갔다.
“당신은 당신의 생각을 혼자만 간직할 수 없나요?” 지젤의 끔찍한 생각들을 보기 싫었던 사람들은 화를 낸다. 사람들의 비난에 지친 지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줄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그런 곳은 없었고 지젤은 여러 도시와 나라를 떠돌다 결국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세상은 변하지 않았지만 지젤은 변했기 때문이다. ‘진실을 받아들이는 건 두려운 일이라 모른 척하는 사람도 많아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온 유리 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법을 천천히 알아가고 있어요.’ 이렇게 이야기는 끝난다.
이 그림책을 아이들이 이해하기는 좀 어려울 것 같다. 볼로냐가 작가의 고향이라는 것을 알자 볼로냐 도서전이 먼저 생각나듯이, 일반적으로 몸이 투명하다면 옷을 입고, 생각이 보인다면 모자를 쓸 궁리를 먼저 해야지. 이런 작은 노력도 없이 너무나 특별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봐줄 곳을 찾아 여행을 떠나다니 참 어처구니가 없다. 그런데 사실, 유리 아이는 세상에 없다. 세상에 없는 유리 아이에게 세상의 일반적인 사고를 요구하는 모순! 작가도 이 모순을 생각하면서 이야기를 만들지 않았을까? 그럼, 작가가 말하는 유리 아이는 무엇일까? 유리 아이는 사람들이 보이는 그대로를 인정하기 거북해하는 어떤 진실일 수도 있고, 세상에서 가장 작고 연약한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그림책은 글과 그림으로 의미를 전달하는 문학 작품이다. 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방법에는 작품 자체의 형식, 언어, 구조 같은 내부요소에만 집중하여 보는 방식과 작가의 삶, 사회적 배경, 역사적 맥락 등 작품 외부요소를 중심으로 작가가 표현하고자 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찾는 방식이 있다. 독자는 작가의 내면과 경험이 작품에 어떻게 반영되었는지, 시대나 사회적 배경이 작품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독자가 작품을 읽고 얻을 교훈과 감동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며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같은 작품을 읽어도 독자만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감상이 달라지므로 작가가 의도하는 바와 상관없이 해석되기도 한다.
〈유리 아이〉를 나다움을 찾으려는 한 아이의 성장 이야기로 보는 독자도 있을 것이고, 진실과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어른들의 이야기로 읽는 독자도 있을 수 있다. 상처받고 깨지기 쉬운 유리 아이의 생각은 보여주는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보는 사람의 문제이다. 슬프고 어두운 생각을 보는 것이 불편하다면, 보지 않으면 된다. 그게 세상 사람들 대부분이 아는 진실이라 하더라도.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에 대다수 국민이 기뻐하고 축하할 때, 스웨덴 한국영사관 앞에서 ‘한강 노벨상 수상 규탄’을 하는 사람들의 기사를 보았다. 그 기사가 염려되는 것은 시위 참가자들이 모두 중년층도 아닌, 노년층이라는 점이다. 기사 제목과 내용, 누리꾼들의 댓글에도 쓰인 ‘어르신들’ 한강 작가의 작품에서 본 그 참혹한 시간을 살아낸 어르신들! 제대로 된 비판을 위해 책부터 읽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