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방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어서 거실 한 귀퉁이에 컴퓨터를 켜놓고 쪼그리고 앉아 있지만 글 한 줄 쓰기가 쉽지 않을 뿐더러 책을 읽으려 해도 문맥을 짚어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어서 억지로라도 그럴 만한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 길은 거의 매일 걷는 산책로의 일부이기도 해서 가고자 할 때마다 걸어가는 상상을 버리지 못하고 매번 무거운 짐을 둘러메지만 걷다가 마주치는 착한 이웃들은 꾸부정한 동양 노인이 가방은커녕 어깨에 티끌 하나 없이 어정어정 걷더라고 훗날 증언할 것이었다
어깨에 매달린 검은 가방이 무겁게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며 햇빛이 등 뒤로 따라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의뭉스러움을 알지 못했다 주문한 커피를 받아 들고 콘센트가 있는 벽 쪽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지퍼가 열리더니 주섬주섬 노트북 컴퓨터가 걸어 나와 테이블 위에 펼쳐졌다 벽 쪽에 자리 잡은 앞뒤 테이블도 사정이 비슷했다
네모반듯한 세상이 천동설에 길들여지고 납작한 바다가 낭떠러지로 쏟아져 내리면 세월이 흘러넘치기 전에 화면을 뒤집어야 하는 자전은 밤낮없이 불야성이고 하루에도 몇 번 씩 계절을 바꾸는 마우스의 공전으로 지구는 각진 테두리에 머리를 비스듬히 베고 누워 있기만 하면 되는 가방 속의 음모 같은 것― 분위가 그럴 만하지 않은가
노트북 컴퓨터가 환하게 산책길을 열면 모퉁이를 돌아 굴레방다리를 만나는 키보드가 대문 밖 건너편 작은 상가 끄트머리에 코리아 ‘비비큐 치킨’집을 개업하고 존스크릭을 튀기는 축지법―
가방을 걸친 어깨가 무겁게 집을 나와 주차장을 휘적휘적 걸어서 먼발치에 있는 애마에 이르면 앞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는다 시동을 걸고 페달을 밟으면 커피 파는 그 빵집은 더 내달릴 것도 없이 바로 그곳에 있다
몇 블록 떨어진 그 빵집이 찻길을 가로 질러 나의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 오고 나는 프레임 없는 한 폭의 그럴 만한 풍경이 된다
시인 약력
1944년생. 서울고와 연세대를 졸업했다.
1997년 ‘시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애틀랜타 한돌문학회, 애틀랜타 한국문인회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 ‘Twin Lakes’(2018년), ‘삭제된 메시지입니다’(2023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