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고 도는 세상이지만 도는 것을 멈춘 것들이 있다. 지난 주말에 버지니아주 Chantilly에 2003년에 건립된 스미소니언 항공우주박물관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Steven F. Udvar-Hazy Center)을 방문했다. 거대한 격납고에 빼곡히 전시된 제각기 용도와 사이즈가 다른 많은 항공기와 우주선이 과거의 영광을 과시하는 것을 보며 “와우!”를 연발했다. 워싱턴DC 몰에 있는 항공우주박물관과 다른 실재감이 있었다.
입구 정면아래로 냉전 시절 최고 속도와 최대의 고도로 탐지를 피했던 날렵한 몸체의 록히드 마틴사가 만든 미공군 전략정찰기, SR-71 Blackbird가 중앙에 자리잡고 신비한 동체를 과시했다. 24년 첩보임무를 마친 스텔스 전투기 주위로 모인 방문자들에 섞여서 안내자의 설명을 들었다. 간혹 공군부대에서 모습을 봤던 탓인지 세월이 지나도 당당한 정찰기는 나에게 친근감을 줬다. 고공을 자유자재로 날랐던 물체의 비밀스런 업적은 현재 우리가 즐기는 자유와 평화이다.
블랙버드를 지나가서 뒤편에 전시된 우주 왕복선 Discovery를 만났다. 지구 궤도 임무를 133번이나 수행하고 2011년에 은퇴한 후 이곳 박물관에 왔다. 내가 공군에서 퇴직하고 지역 상공회에 근무할 적에 올랜도에서 열린 동남부주들과 일본의 연례회에 참석했었다. 그때 플로리다주 정부의 주선으로 참가자들 모두 케네디 우주센터를 방문해서 여러 시설에서 우주선의 발사 준비 과정과 TV에서 생중계 해주던 우주선 발사 패드를 가까이서 보고 인간의 위대한 능력에 크게 감동을 받았다. 그 정경에 이 디스커버리 우주선이 들어있었다.
항공 엔지니어들의 창조물인 세상에서 가장 작은 비행기를 보며 감탄하다가 전세기 경비행기들의 여러 모습에서 세월의 흐름을 느꼈다. 비행물체를 만든 자재가 조금 달랐지만 그것 역시 단순하고 실질적이었던 그 당시의 시대상을 보여줬다. 그리고 세계 2차 대전에서 활약한 여러 나라의 전투기나 폭격기를 둘러보며 비행기술의 발전을 따라갔다. 나치 독일의 악명 떨친 전투기의 파워풀한 엔진을 보고 작은 일본 전투기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보다 먼저 안내문을 읽은 남편이 짙은 국방색 몸체에 붉은 서클 마크를 가진 비행기를 지적하며 “이 전투기가 태평양을 날라와서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 했어.” 하자 “이것이 전범이군” 응수했다. 미군기에 격추당하지 않고 살아 남아서 이렇게 미국땅에서 과거의 죄과를 치르고 있는 작은 비행기에 연민이 느껴졌다. 그러다가 일본 전투기들 가까이에 전시된 미 폭격기 B-29, Enola Gay를 보자 내 눈이 확 떠졌다. 1945년 8월6일, 조종사인 Paul Tibbets대령의 어머니 이름인 Enola Gay가 프린트된 이 폭격기가 바로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장본인이다.
원폭은 히로시마 시의 4분의 3을 파괴시키고 종전을 끌어냈지만 인류역사에 참혹한 획을 그었다. 순간 일본 관광객들이 이 비행기를 보며 어떤 감정을 가질지 상상하니 기분이 묘했다. 미국을 2차대전에 개입시킨 시작과 끝이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이렇게 박물관의 전시품으로 존재하는 것은 지나간 흔적은 지울 수 없음이다. 조종사들은 세상을 떠났지만 전투기나 폭격기는 초연하게 과거에 살고있었다.
한국전과 월남전에 투입되어 활약했던 헬리콥터 외에도 특별한 공적을 세운 로켓과 미사일, Air France Concorde 를 포함한 민간 항공기, 많은 비행기 모형들과 조종사들의 손때가 묻은 유품들이 곳곳에 전시되어서 실감을 줬다. 지상 전시장을 돌고나서 2층 전망대를 따라 돌면서 위에서 내려다본 항공기들의 위용은 여전히 막강했다. 더불어 한곳에서 비행기 복구 작업을 하는 장소 또한 놀라웠다. 엄청난 시설과 대단한 의욕이 과거를 현재로 데려왔다.
그리고 7층 높이의 관제탑에 올라가서 사방으로 확 터인 평화로운 정경을 보다가 가까이 있는 덜레스 공항에 수시로 이착륙 하는 여러 나라의 비행기를 봤다. 격납고에 멈춘 비행기들을 모른 채 하늘을 나는 비행기들을 보며 언젠가 본 애리조나 넓은 평원에 기종별로 죽 늘어서 있던 비행기들의 공동묘지가 생각났다. 상공에서 전성기를 누볐지만 쓸모가 없어져 땅 위에 축 늘어진 모습이 생생하게 하늘을 누비는 항공기와 겹쳐졌다.
사람은 죽으면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긴다는데 박물관에 멈춘 죽은 비행기도 기억력이 짧은 인간들에게 위대한 스토리텔러로 역사공부 시켜준다. 그리고 비행물체 하나 하나가 가진 독특한 스토리가 전세기와 현세기를 연결, 존재의 의미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