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곱 식구가 먹는 밥상에는 늘 그릇이 한가득 놓여 있었고 이웃 아주머니의 말씀처럼 우리집 밥상은 무슨 잔치집처럼 커다란 상 위로 놓여진 그릇에는 많은 양의 음식들이 담겨있었다. “얘들아 밥 먹자!” 엄마가 부르기 시작하면 사방에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여와 한곳에 앉는다. 엄마는 30년 넘도록 그렇게 식구들 입에 들어갈 음식을 만들고 상을 차려 주셨다.
아들, 딸들 하나 둘씩 짝지어 결혼하고 집을 떠나면서 우리집 밥상은 크기가 줄었고 음식도 줄어 들었다. 차려진 밥상을 보면 음식을 준비한 사람의 마음이 보이기도 하고 누구를 먹이기 위한 음식 인지도 알게 된다. 자녀들을 독립시키고 부부만 남은 식탁은 검소하고 조촐해 지더니 남편마저 먼저 떠나고 혼자 남은 엄마의 밥상은 점점 초라해 졌다. 그동안 엄마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식구들을 위한 상차림만 해 오셨던 모양이다.
그렇게 엄마의 밥상을 받아먹기만 하던 내가 엄마가 되어 밥상을 차린 지 어느덧 20년이 넘었다. 매일 가족들이 먹을 음식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알맞은 재료와 손질로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거기에 맛까지 맞추어야 하니 보통 수고가 드는 일이 아닌 것이다. 가족이 함께 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소중한 일인지를 엄마가 되기 전엔 미처 몰랐었다. 그래서 먹는 일에 목숨 건 사람처럼 음식을 준비하는 나의 엄마가 답답하다 생각하고 들으면 야속할 만한 말을 많이 했으니 정말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이다.
지난주에는 동생이 자궁 적출이라는 큰 수술이 있어 동생네 집으로 가서 일주일 동안 동생네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게 되었다. 동생과 나는 같은 시기에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이민 생활이 그렇듯 우리는 가족의 먹거리를 준비하고 해결하느라 갖은 애를 썼다. 한국에서는 그렇게 집에서 모든 걸 해먹지는 않았기에 그야말로 손에 물 마를 날 없을 만큼 밥해 먹는 것이 보통일이 아니었다.
동생은 도넛가게를 운영하고 있으니 해야 할 일이 두배로 많았을 것이다. 얼마나 고단하게 살았을 지 충분히 알 수 있기에 먼 길 달려가 동생을 살펴 주었다. 수술을 하게 되면 전날부터 금식을 해야 하고 수술 후에는 하루정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없게 된다. 동생도 이틀 동안은 아무것도 입에 넣지 못하고 힘들어 했다.
첫 식사로 병원에서 나온 음식은 부드럽고 소화가 잘 되는 것들과 사과 주스 와 아이스 티 정도였다. 환자에게 가장 적절한 것으로 준비되어진 것이리라. 이렇게 음식은 먹는 사람을 생각하고 알맞은 것들로 차려지는 것이니 밥상을 준비하는 사람은 여러모로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많아진다.
모처럼 동생도 본인이 직접 하지 않은 음식들로 식사를 하게 되니 한편으로는 너무 편하다며 그 와중에도 기뻐할 수 있어 감사했다. 동생은 몸은 아프고 불편했지만 바쁜 일상의 것들을 내려놓고 일주일 동안 언니가 해주는 음식 먹고 집안 치워주고 빨래해주고 누워 이야기하고 같이 자고 하니 고단했던 일상에서 잠시 휴가를 받아 쉬게 하는 것 같아 너무 좋다고 했다.
오랜만에 언니와 쇼핑도 가고 나가 돌아다니고 싶다고 하면서 결혼 전 둘이 여행 다니고 쇼핑 다니던 추억을 떠올리며 수다를 떨다 보니 결혼 후 아이를 낳고 키우며 집안의 엄마로 살아가고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 하게 되는 모든 수고가 새삼 거룩한 여정처럼 느껴져 서로에게 수고했다 말해주며 위로했다.
부모가 되어 가족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 위해 애쓰는 우리들에게 근사한 밥상한번 차려놓고 먹으라 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기분 좋은 상상도 하면서 그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밥상은 무엇인지 서로 물었다. 나는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시댁에 인사간날 새사람을 위한 것이라며 커다란 상에 가득 준비해 주신 시어머니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지던 따뜻한 밥상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있다. 지금은 본인의 밥도 지을 줄 모르시는 어머니가 되셨으니 내가 준비해서 차려드려야 할 어머니를 위한 밥상은 빚으로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