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스스로 통치하려는 마음을 갖지 않을 경우 최대의 벌은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통치당하는 것”이라고 썼다. 최근 회자되는 “정치를 외면한 가장 큰 대가는 저질스러운 자들에게 지배당하는 것”이라는 인용구의 원전이다. 정치 참여 독려로 들리지만, 플라톤은 오히려 대중민주주의를 극도로 경계했다. 그는 정치 형태를 좋은 순으로 최선자정체(最善者政體), 명예지상정체, 과두정체, 민주정체, 참주정체의 5단계로 구분했다. 이상적 모델인 최선자정체에서는 ‘철인’이나 여러 명의 현자가 통치자다.
첫 번째 쇠퇴 단계인 명예지상정체에선 승리와 명예에 대한 욕망이 서로 충돌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부자 중심의 과두정으로 이어진다. 그 다음이 민주정체다. 플라톤이 본 민주정체는 “부(富)를 향한 투쟁이 극한으로 전개되고, 무제한의 자유 탓에 욕심과 쾌락에 빠진 나라”다. 민주정은 독재자가 지배하는 가장 사악한 참주정으로 귀결되고 만다. 아테네는 추첨으로 통치자를 결정했다. 모두 신에게서 같은 재능을 부여받았다고 전제했기 때문이다. “민주정은 대중의 선호가 도덕이 되는 중우정치로 변질할 위험이 농후하다”는 게 플라톤의 요지다.
오늘날 우리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진화된 세계에 살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이 세계가 탁월한 개인들이 이뤄낸 분투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복지 혜택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복지를 가능케 하는 개인의 창의성과 정당한 노력의 대가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대중은 그들이 추구하는 획일적 평등주의가 문명사회를 지탱하는 각종 시스템을 서서히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대중의 반역〉은 스페인 출신인 세계적 철학자 오르테가 이 가세트(1883~1955)가 일간지 ‘태양(El Sol)’에 기고한 글을 모아 1930년 단행본으로 엮은 책이다. 가세트가 분석한 대중은 ‘특별한 자질이 없는 평균인의 집합체’다. 그런 대중이 민주주의 도입으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고, 이제는 문명사회를 지배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이를 ‘대중의 반역’이라고 명명했다. 역사의식과 식견이 부족한 대중이 이끄는 정치가 인기영합 정책에 휘둘리는 중우정치로 전락할 가능성이 높아서다. 그는 익명성에 의존하는 대중이 ‘다수’를 내세워 전방위적으로 힘을 과시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대중은 국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들의 투표가 집권 세력의 정당성을 대변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빈곤 등 개인적인 문제에도 국가가 즉시 개입해 해결해 주기를 기대한다. 이른바 ‘삶의 국유화’다. 이는 문명 발전의 동력인 개인의 창의와 자발적 노력을 말살한다.”
획일적 평등주의는 대중이 필연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는 게 가세트의 지적이다. 대중은 ‘특정한 기준에 따라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동일시하면서 편안함을 느끼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들(대중)에게 남들과 다르다는 것은 꼴사나운 것이다. 사회의 평균적 기준에 적합하게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만큼 가져야 하고, 남들이 누리는 만큼 누려야 한다. 만약 그 기준에 미달하면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눕혀진 사람처럼 길면 잘라야 하고 짧으면 늘려야 한다.
비대해진 대중 권력과 여기에 영합하는 정치세력이 결부하면 자유주의와 민주질서는 파괴되게 마련이다. 대중에 영합하는 정치가 더 큰 문제다.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아부하고 온갖 좋은 말을 늘어놓는다. 대중은 대개 그런 사람들을 선택한다. 힘이 세진 대중은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폭력을 행사한다. 때로는 비범함도 단죄의 대상이 된다. 이것은 결국 비(非)지성주의를 낳는다. 자기 통제를 상실한 대중은 또 다른 불평등과 억압을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다.
혼돈의 시대다. 진실이 무엇인지, 과연 있기나 한지 혼란스럽다. 정치가 무소불위로 군림하려는 시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진행되고 있다. 요즘 한국의 정치판 돌아가는 모습을 보라. 정치가 극한투쟁의 악이 될 때는 정치가 종교화되었을 때이다. 어느 정도 정치의 종교화는 인간의 본성상 피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래서 정치 엘리트들은 끊임없이 균형을 잡아야 한다. 정치 엘리트가 자신이 더 광신적이 되든지 아니면 민중의 종교심을 자극하여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의 목표로 하면 그 나라는 망한다.
〈대중의 반역〉은 사람들이 썩 유쾌하게 받아들일 내용을 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몸에 좋은 약은 쓰다고 하듯 이 책의 내용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 쓴 소리들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즉 ‘대중의 성찰’을 위한 도구로 사용해야 할 터이다. 물론 오르테가는 그것을 위해서 글을 쓰지는 않았을 테지만 그것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오히려 대중이 자만에 빠진 철부지가 아님을 보여줄 수 있을 터이니 유쾌한 내용이 아닐지라도 더욱 깊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던 함석헌 선생의 절규가 귀에 쟁쟁하다. “아무런 불덩이도 삼켜져 목구멍을 내려가면 되건만 이것은 아직 목구멍에 걸려 있어 우리를 괴롭힌다. 이 올가미를 벗어버려야 한다. 뜻을 품으면 사람, 뜻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전쟁을 치루고도 뜻도 모르면 개나 돼지다.”
어떻게 생각하며 사느냐가 중요하다. 사유하기를 포기한 고립된 대중은 전체주가 뿌리내리게 하는 자양분이 된다. 사유를 포기한 고립된 개인들을 단지 정치적 종교적 도구로 이용하는 자들이 획득한 정치권력을 앞세워 언론과 미디어를 지배하는 지금, 전체주의는 포장 미화되어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다. 사유를 포기한 고립된 사람들을 정치적 종교적으로 이용하는 자들이 탈진실의 시대에 ‘개, 돼지’가 아닌가. 정치, 종교, 미디어 등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때 이러한 내면적 전체주의는 언제나 양산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우리는 가슴 깊이 새겨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