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서 최근 3개월간 4명 사망…여성·노인에서 성인 남성으로 ‘타깃 확대’
요즘 뉴욕시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의 수렁에서 이미 한 발쯤은 빠져나온 분위기다.
뉴욕시가 지난 7일부터 학교 마스크 의무화와 식당, 체육관 등 실내 다중이용시설에서의 백신 접종증명 의무화를 폐지하면서 방역 규제 대부분을 해제한 것이 결정적 순간이었다.
이후 지난 한 주간 거리에서는 물론 체육관에서도 맨얼굴을 내놓는 사람들이 10명 중 최소 7명은 넘는 듯했다.
대중교통에서는 여전히 마스크를 써야 하고 대부분 공연장과 일부 식당은 백신 접종을 계속 확인하고 있으나, 이런 의무가 사라지는 것도 시간 문제라는 낙관론이 팽배하다.
2년 전 미국 내 대유행의 첫 피해자가 됐던 뉴요커들이 지난 1월 이후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세가 진정된 것을 기점으로 서서히 정상적 삶으로 돌아가는 문을 노크하는 모양새다.
그러나 코로나19 사태에서 튄 아시아계 증오라는 불똥은 함께 사그라들기는커녕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다.
질병의 발원지가 중국이라는 이유로 무분별한 증오와 화풀이 대상으로 전락한 아시아계의 처지는 코로나19 사태 시작으로부터 2년, 한인 4명 등 모두 8명의 목숨을 앗아간 애틀랜타 총격 사건으로부터 1년이 각각 지나도록 나아지지 않았다.
2월15일 뉴욕시 맨해튼 차이나타운에서 열린 한인 여성 피살 사건 규탄 집회에서 발언하는 흑인 단체 101수츠의 케빈 리빙스턴 창립자. 2022.2.16 firstcircle@yna.co.kr
증오범죄의 강도와 수법의 대담함이라는 측면에서는 오히려 위협이 더 커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월 타임스스퀘어 지하철역에서 정신이상 노숙자가 중국계 여성을 선로 위로 떠밀어 숨지게 한 사건과 2월 또 다른 노숙자가 맨해튼 차이나타운 자택으로 귀가하는 한국계 여성을 뒤따라가 살해한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다.
작년 4월과 11월 각각 이유없는 폭행으로 쓰러졌던 60대 남성과 여성이 연말연초 결국 사망한 것을 더하면 최근 3개월여 동안 뉴욕시에서만 아시아계 4명이 증오 폭력의 결과로 목숨을 잃은 셈이다.
지난달 27일 맨해튼 남부 일대에서 20대 남성이 두 시간 동안 무려 7명의 아시아계 여성을 공격한 사건도 공포를 더했다.
주로 여성과 노인을 겨냥하던 아시아계 증오범죄의 타깃이 성인 남성으로 확대되고 있다는 점도 우려스럽다.
지난 8일 맨해튼의 한 지하철역에서 여장을 한 40대 흑인 남성이 자신과 부딪혔다는 이유로 망치를 꺼내 아시아계 남성의 머리를 내리쳤다가 붙잡혔고, 지난달 말에는 플러싱에서 30대 한인 남성이 흉기 피습을 당했다. 지난달 9일에는 50대 초반의 한국 남성 외교관마저 ‘묻지 마 폭행’의 피해자가 됐다.
흉흉한 분위기 속에 뉴욕 한인들 사이에서는 “무서워서 지하철을 못 타겠다”는 등의 푸념이 자주 들린다.
인종 차별, 코로나19 사태 후 급격히 악화한 도시 치안, 상대적으로 미약한 정치·사회적 영향력 등을 배경으로 한 아시아계 증오범죄 급증은 뿌리가 깊고,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맞물린 현상인 만큼 해소가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계 작가 퍼트리샤 박씨는 최근 뉴욕타임스(NYT) 기고문에서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모델 마이너리티'(모범적 소수층) 강박관념 때문에 피해를 당해도 잘 신고하지 않고 침묵을 지킨다는 점도 한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런 가운데 지금까지 주로 뉴욕 등 대도시 기반의 민주당 의원들이 목소리를 높여온 아시아계 증오범죄 문제를 공화당의 유력 정치인이 주도하고 나서 귀추가 주목된다.
상원 법사위 공화당 간사인 척 그래슬리(아이오와) 의원은 지난 8일 전반적인 증오범죄 급증에 관한 청문회를 열어 흑인, 아시아계, 유대인 등을 콕 집어 거론하면서 “의회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고 강조했다. 미주한인유권자연대(KAGC)도 이 청문회에 초청받아 아시아계 문제를 보고했다.
김동석 KAGC 대표는 연합뉴스와의 통화에서 “상원에서 아시아계 증오범죄를 구체적으로 따지는 작업이 시작됐다”며 “그동안 의회에서 이 문제를 초당적으로 진행하지 못했는데 공화당에서 소수계의 입장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고 말했다.
다만 아시아계를 겨냥한 폭력적 증오범죄 가해자 중 다수는 흑인 등 또 다른 소수계라는 점에서 전반적인 증오범죄를 함께 다룰 경우 아시아계가 만족할 만한 맞춤형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지 미지수라는 우려의 시선도 있다. 연합뉴스 강건택 특파원.